제주도 정착 탈북 성악교수의 꿈[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21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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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가수로 15년 넘게 살았던 허영희 전 혜산예술대학 성악교수가 제주도에서 열린 한 음악회에 참가한 모습. 허영희 교수 제공.
북한에서 가수로 15년 넘게 살았던 허영희 전 혜산예술대학 성악교수가 제주도에서 열린 한 음악회에 참가한 모습. 허영희 교수 제공.

“허영희 맞지? 나와.”

총을 든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담담히 군인들을 따라 차를 타고 끌려간 곳은 양강도 주둔 북한군 12군단 보위부 감방이었다.

군인들은 그날 밤 잠을 재우지 않더니, 다음날 취조실로 끌고 갔다.

군단 보위부 고위간부가 두터운 서류철을 들고 들어와 한참을 뒤적이더니 물었다.

“왜 잡혀왔는지 알겠지?”

“네. 그렇지만 죽으면 죽었지 제자를 감시할 수는 없습니다. 보위부가 선생에게 이런 걸 시키는 게 잘못된 일이죠.”

“도대체 그 제자와 어떤 관계이길래 당에서 시키는 임무도 거부하는 건가?”

허영희 교수(61)는 제자와의 역사를 담담히 풀어놓았다.

“제자이기 전에 딸 같은 애입니다. 못해요.”

보위부 간부는 그의 이야기를 한참 듣더니 보초를 불렀다.

“선생님 데려가 재우라.”

그날 이후 조사관은 더 이상 취조실에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허 교수의 감옥 생활이 시작됐다.

그때가 2013년 1월. 4월 15일까지 76일간의 수감 생활이 시작됐다.

혜산예술대학 성악교수로 15년 동안 재직하던 그가 잡혀온 이유는 제자를 감시하라는 보위부의 지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2012년 3월, 12군단에서 반탐(방첩)을 책임진 보위부 간부가 집에 찾아왔다. 군단 산하 군관과 결혼한 제자가 한국 물품을 밀수하는 것 같은데, 물증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가 조사해보니 그 제자는 허 선생에겐 비밀이 없다고 하던데 도와주세요.”

“옆집을 감시하라면 해도 어떻게 스승에게 제자를 신고하라고 합니까. 절대 못해요.”

고분고분하지 않자 보위부 간부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평양 가서 공부하는 아들이 더 중요하나, 아님 제자가 더 중요해?”

어쩔 수 없이 “생각해 보겠다”고 답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밤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다음 날 제자를 찾아갔다.

“보위부에서 너를 감시하는 것 같은데 조심해라.”

그러나 보위부 감시망이 허 교수에게만 향한 게 아니었다.

2013년 1월 제자와 그의 남편은 군 보위부에 체포돼 끌려갔다. 그 소식을 들은 허 교수는 곧 나도 잡아갈 것이라 각오하고 있었다.

허영희 교수가 함께 탈북한 제자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한 공연에 참가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허영희 교수가 함께 탈북한 제자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한 공연에 참가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 감방에서 반동이 되다.

허 교수가 추위를 견디며 구속돼 있던 감방에는 다른 여성들도 잡혀와 있었다. 보위부에선 인신매매범들이라 불렀다. 그런 범죄자들과 같은 감방에 있는 것도 치욕이라 그는 생각했다.

처음엔 “너희들은 할 짓이 없어 중국에 사람을 팔아 먹냐”고 분노도 했다.

그들이 서로 쳐다보며 “아니, 이 할머니는 어디서 왔나”라며 더 놀라워했다. 이들과 함께 지내며 허 교수는 비로써 북한의 속살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한 여인이 보위부 조사 서류를 쓰면서 통곡하더라고요. 엄마가 딸의 손을 잡고 와 중국에 딸을 보내 달라 사정해서 돈도 안 받고 보내줬는데, 그 딸이 잡혀왔어요. 강을 건네준 그 여인은 중국에 여자를 팔아먹는 인신매매범으로 잡혀왔어요.”

감옥에 갇힌 여인들은 대부분 중국에 사람을 넘겨주고, 한국에서 돈을 받아 북한 가족에게 전달해주고, 한국과 통화를 했다는 이유 등으로 잡혀 왔다. 북한은 이들을 인신매매범이라 낙인찍고 감옥에 보냈다.

감방 일과는 감시를 받으며 하루 종일 계속 앉아 있는 것이었다.

허 교수는 곰곰이 생각했다.

‘일제(강점기) 때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인도 엄마가 딸을 팔진 않았다. 이들이 죄인이 아니라 나라가 죄인이 아닌가.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중국 산골에 팔려가 맞아죽고 남몰래 암매장 돼도 어디에 하소연 할 수도 없는 것이 과연 누구 탓일까.’

허 교수는 자기가 북한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7세 때 할아버지가 부유했다는 이유로 가족과 함께 양강도 백암이라는 심심산골로 추방됐다. 그러나 뛰어난 노래실력 때문에 혜산예술전문학교에 입학했고, 1982년부터 양강도 예술단 가수가 됐다. 전국 가요 콩쿠르에 나가 1등도 두 번이나 했다. 여름이면 삼지연 별장에 피서를 온 김일성 앞에서 공연도 여러 번 했고 기념사진도 많이 찍었다.

1998년 모교인 혜산예술대학 성악교수로 옮겨가 제자를 양성했다. 평생 조국의 선전 전사로 충성을 다했고 1년 뒤면 명예로운 은퇴도 예고됐다. 그러나 제자를 감시하라는 보위부의 임무는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감옥 안에서 허 교수는 체제에 환멸을 느끼는 ‘반동’이 돼 버렸다.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 ‘태양절’에 당의 배려라며 석방됐다.

보위부 앞마당에 마중 나온 남편이 76일 동안 목욕 한번 못하고 야윈 아내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왜 울어. 저 새끼들이 좋으라고 우나. 울지 마.”

남편이 깜짝 놀라 아내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은 더는 예전의 눈빛이 아니었다.

● 제자와 함께 탈북

감옥에서 북한 사회에 환멸을 느낀 최 교수는 더 이상 그 땅에서 살기 싫었다.

그가 살던 혜산 예술인아파트는 80세대가 살고 있었다. 이웃으로 지냈던 수많은 이들이 한밤중에 사라졌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나면 북에 남은 가족들이 돈을 펑펑 쓰기 시작했다. 생각이 바뀌니 목표가 생겼다.

‘남조선이란 곳이 저렇게 살기 좋은 곳인가. 여기서 평생 속절없이 살지 말고, 늙었지만 나도 한번 가서 살아보고 싶다.’

그러나 남편과 아들이 있기에 선뜻 떠날 수는 없었다.

양강도 예술단 가수 시절 한 직장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2살 연하의 남편 최성가를 만났다. 남편은 그때 북한에 알려지지 않았던 ‘데니보이’ 악보를 갖다 주며 그녀에게 접근해왔다. 사랑이 싹텄고, 결혼을 했고 아들을 낳았다. 같은 직장을 다녔고, 지방 공연도 함께 갔다. 허 교수는 탈북할 때까지 단 하루도 남편과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했다. 남편은 예술단 기량과장을 지냈고, 나중에 문화예술부 자재공급소에서 일했다.

1988년에 태어난 허 교수의 외아들 최경학은 수재들만 가는 1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혜산의학대학 졸업 후 평양의학대학에 진학해 박사원(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연주하는 과학자가 되라며 음악과 과학을 함께 가르쳤는데, 뿌듯하게 잘 컸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험한 탈북길에 가족을 선뜻 함께 데리고 나설 수도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럴수록 여기서 살 수 없다는 답은 더 확고해졌다.

2014년 9월 마침내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 허 교수는 제자를 찾아갔다. 보위부에서 감시하라고 했던 그 제자였다. 제자는 일정 기간 구금 생활을 마치고 석방됐다. 그 역시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부대에서 주는 배급조차 병사들에게 양보했던 남편은 밀수를 도왔다는 이유로 군복을 벗고 1년 동안 노동교화소에 끌려갔다.

“나 여기서 없어질래. 가족은 위험해서 함께 못 가지만 내가 먼저 길을 만들어야겠어. 가서 살만한 세상인지 보고 가족도 데려갈 거야.”

“한달 있으면 평양에서 아들이 오는데 보고 가시죠.”

“내가 그래서 지금 떠나. 그 애를 보면 못 갈 거 같아.”

한참 말이 없던 제자가 말했다.

“저도 선생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감방에서 만났던 ‘인신매매범’들이 브로커를 소개해 탈북할 길을 안내해주었다. 한국까지 오는 길은 비교적 수월했다.


● 제주도 정착하다

2015년 5월 하나원을 나와 제주도에 집을 받았다. 서울에 집을 받은 제자는 함께 살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나처럼 늙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불편하지. 우리 멀리 떨어져 살자. 너는 네 인생을 개척해.” 훌훌 털고 제주도에 와보니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북에서 한 아파트에서 살다 탈북해 한국에 온 옛 이웃들도 만났다.

“아니, 선생님은 잘 살았는데 왜 오셨어요?”

“너는 왜 왔냐. 우리가 돼지냐.”

이제 가족을 데려올 돈을 벌어야 했다. 자본주의에 살려면 시장경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시장을 찾으니 5일장을 소개해 주었다. 거기에서 옥수수를 판매하는 아르바이트를 얻었다.

같이 일하는 한 여인이 “언니, 옥수수 팔려면 소리를 쳐야 한다”며 눈치를 주었다. 교수의 체면이 남아있어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지만, 이게 시장경제인가 라는 생각에 오기가 생겼다.

“내가 소리치면 너보다 훨씬 잘해.”

그날부터 장보러 왔던 사람들은 한번씩은 눈이 커졌다.

옥수수 파는 여인이 “옥수수 여섯 개에 오천원!”을 외칠 때마다 시장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라이브로 듣는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착해가고 나니 한국에선 나이든 여인이 200만 원 이상 벌 수 있는 곳은 호텔 청소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에 올 때부터 노래를 다시 부르거나 학생들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했어요. 북한에서 아무리 잘했다고 해도 거긴 외국곡 하나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죠. 여긴 외국에서 유학을 한 가수도 많은데, 나 같아도 북에서 온 여자에게 아이를 맡기지 않겠어요. 여기 올 때부터 제일 아래에서부터 올라가자고 생각했죠.”

리조트 청소를 하면서 언니, 동생으로 부르는 이들도 생겼다. 낙천적 성격인 그녀를 모두 잘 대해주었다. 가족을 빨리 데리고 오라며 돈도 빌려주었다. 너무나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 가족의 체포

가족을 데리고 올 돈이 생기자 그는 북한에 연락해 남편을 설득했다. 마침내 남편도 동의했다. 아들을 설득하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평양의대 박사원을 막 졸업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탈북했다. 2016년 9월 26일. 2년 전 허 교수가 탈북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러나 강을 넘은 부자는 하루 만에 공안에 체포돼 손을 쓸 사이도 없이 북송됐다.

남편과 아들의 체포 소식에 허 교수는 쓰러졌다. 북한 이곳저곳 연락해 가족을 수소문했지만, 아는 이는 없었다. 한국행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간 게 분명했다.

어느 날 그는 아는 사람에게 제주도에서 통곡을 해도 들리지 않는 곳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한라산 자락 어느 깊은 산속에 주저앉아 남편 이름을 부르며 통곡했다.

“성가야. 성가야.”

집에서 부르던 남편의 이름이었다.

나중에 그를 데려갔던 사람이 물었다.

“보통 아들을 부르는데 왜 남편 이름을 부르며 울었어요?”

“아들은 저를 닮았어요. 걔는 어떻게든 버틸 거 같아요. 그런데 남편은 너무 여리고 착한 사람이라 수용소 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할 거 같았어요. 너무 불쌍하고 미안하고, 미안하죠.”

남편과 아들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고 생각되자 그는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극단적 선택을 생각했다.

“죽으려 했어요. 못한 이유는 단 한가지예요. 남편과 아들을 빨리 데려오려고 청소하면서 만났던 친구들이 1700만 원, 1000만 원씩 빌려줬어요. 청소를 해보니 그 돈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알아요. 죽어버리면 저를 믿고 돈을 빌려준 그들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죠. 죽더라도 돈은 갚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평양의대 박사원을 졸업한 아들 최경학의 어릴 적 사진. 어머니를 따라 탈북하다 체포된 뒤 수용소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허 교수는 탈북할 때 사진을 챙기지 못했다. 한 동네에서 살던 탈북민이 자신의 사진첩에서 최경학의 사진을 발견해 준 것이다. 허영희 교수 제공
평양의대 박사원을 졸업한 아들 최경학의 어릴 적 사진. 어머니를 따라 탈북하다 체포된 뒤 수용소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허 교수는 탈북할 때 사진을 챙기지 못했다. 한 동네에서 살던 탈북민이 자신의 사진첩에서 최경학의 사진을 발견해 준 것이다. 허영희 교수 제공
● “남쪽엔 좋은 사람이 참 많더라.”

허 교수는 남쪽에서 살면서 감사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다고 말했다.

가족을 데려오라며 돈을 빌려주었던 친구들은 그녀 가족의 체포 소식을 들은 날 “우리가 돈을 빌려줘 가족이 체포된 것 아니냐”며 함께 울었다. 돈을 갚으려 하자 “사람을 잃었는데 돈이 문제냐”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허 교수는 재작년까지 그 돈을 다 갚았다. 빚을 갚는 날 또 다같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한 지인이 허 교수에게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가져다줬다.

“몇 페이지를 읽어보니 더 못 읽겠어요. 울음이 터져 나와서요. 왜 이렇게 가슴 아픈 책을 줬냐고 원망했습니다. 그래도 다 읽어보니 그가 왜 이 책을 제게 줬는지 알겠더라고요. 저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이겨내고 그 경험으로 세계적인 의사가 됐어요. 우리 아들도 수용소 생활을 이겨내고 저렇게 될 거라는 믿음 같은 게 생겼죠.”

그는 5년 동안 숙박업소 청소를 하다가 올해 2월 집 인근 치과병원에 취직했다.

매일 문을 열기 전 병원을 청소하고 의료 폐기물을 버리는 일이다. 올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제주도 관광업계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 청소하던 친구들이 일거리를 잃었지만 그는 다행히 계속 일을 하고 있다.

허 교수는 취직한 병원 의사와 딸 같은 어린 간호사들도 편하게 대해 주는 것이 감사하다고 했다.

“원장님이 제 치아를 억지로 검사하더니 120만 원짜리 임플란트를 해줬어요. 돈을 내려 했는데 ‘50년 뒤에 갚으라’더군요. 예전에 우리 아들을 한국에 데려와 의사를 시키고 제가 청소를 해주면 좋겠다는 꿈을 꾸었어요. 이 병원을 아들 병원이라 생각하고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청소를 할 겁니다.”

허영희 교수가 한라산 기슭에 올라 멀리 백두산 아래에 있는 자신의 고향 혜산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하늘 아래 어디엔가 남편과 아들이 있을 거라 굳게 믿으면서. 허영희 교수 제공
허영희 교수가 한라산 기슭에 올라 멀리 백두산 아래에 있는 자신의 고향 혜산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하늘 아래 어디엔가 남편과 아들이 있을 거라 굳게 믿으면서. 허영희 교수 제공
● 살아야 할 이유를 찾다

이제 허 교수는 극단적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살고 있는 제주도가 산도 있고 바다도 있어 정이 들었다. 자신의 존재가 주변에서 쓸모가 있고 할 일도 있음을 느꼈다.

“내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이 북에 관심을 갖고 통일을 생각하더라고요. 그들이 북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갖도록 하려면 저부터 모범이 돼야겠죠. 교수했다고 틀(체면)을 차리지 말고 모든 걸 내려놓고 새로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북한 사람들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갖게 되겠죠.”

그는 “북한에 관심도 없던 주변 사람들이 이젠 북한 소식을 자기보다 더 빨리 보고 알려준다”며 환하게 웃었다.

1년 전에는 한 사이버대학에 입학했다. 자격증이나 취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첫 중간고사를 쳤는데 컴퓨터에 미숙해 성적을 어떻게 확인하는지도 몰랐다. 기말고사 때는 성적을 확인해 볼 수준이 됐다. 꼬박꼬박 강의를 들었지만 점수는 대부분 C학점을 받았다고 한다.

“북에선 1등만 하려 했고, 노래도 남들에게 지기 싫어 노력했는데 이젠 져도 편안하니 새로운 세계관이 생긴 것 같아요. 제 아들이 컴퓨터를 정말 잘했어요. 아들이 옆에 있었다면 제가 컴퓨터를 이렇게 배울 일도 없었겠지만, 혼자 사니 컴퓨터도 배우게 됐어요.”

그는 앞으로 30년 더 사는 게 목표다.

“어렸을 때 우리 할머니가 그랬어요. 일제 때 매일 ‘텐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며 살았는데 어느 날 자고 깨니 해방이 왔다고요. 30년 더 살면 그런 날이 오지 않겠어요. 그때까지 돈 많이 모으고 제주도에 좋은 집을 사서 남편과 아들에게 평생의 속죄를 하고 싶어요.”

남편과 아들 이야기를 할 때마다 허 교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수용소에 간 남편과 아들의 생사는 여전히 알 길이 없어요. 누구나 탈북에 성공할 수 없는 거고, 제 남편과 아들은 불행하게도 성공 못한 사람에 속했죠. 그런데 지금도 북한에서 남편과 아들처럼 착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가고 있나요. 나라가 만든 죄인들이죠. 저는 김정은이 이제라도 마음을 바꿔 더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남편과 아들이 죽었어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허 교수는 집 앞 바닷가에 나가 해가 지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기자와 만난 8월 중순에도 인터뷰를 끝내고 바닷가에서 석양을 함께 바라봤다. 온갖 상념이 그때만큼은 날아간 듯한 표정이었다. 석양 아래 어디선가 그리운 얼굴들이 그를 향해 웃고있는 것처럼...


허영희 교수가 2년 전 제주시민밴드의 요청으로 무대에 올라 그리움과 한을 담은 노래 임진강을 부르는 모습이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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