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보좌진이 된 아오지 남녀[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14일 14시 00분


코멘트
아오지.

북한의 웬만한 도시보다 한국에 더 많이 알려진 지명이다. “아오지 탄광에 간다”는 말은 곧 ‘숙청’이란 의미로 읽힌다. 6.25전쟁이 끝난 뒤 수많은 국군포로가 이곳에 끌려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아오지는 행정구역상 한반도 최북단 함경북도 은덕군에 위치해 있다. 은덕군의 원래 명칭은 경흥군이었지만, 1977년 북한은 김일성의 은덕으로 나날이 변모해가는 고장이라는 의미로 행정지역 명을 은덕으로 바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때 가장 많은 아사자(굶어죽은 이)가 발생한 지역 중 한 곳이다. 가만히 앉아 굶어죽을 수는 없다며 탈북한 사람도 많다. 그렇게 한국에 온 수많은 아오지 출신 탈북자들은 북한에서도 가장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았던 정신력으로 남쪽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다.

매일 아침 서울 여의도 국회로 출근하는 사람들 중에 아오지에서 탈북한 두 남녀가 섞여 있다. 김영춘 국회 사무총장의 비서(7급)인 조경일 씨(32)와 지성호 미래통합당 의원의 인턴비서로 일하는 주은주 씨(38)가 주인공이다. 이들을 12일 광화문에서 만나 그동안 걸어온 삶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같은 국회에서 일하지만 둘은 서로를 몰랐다. 이날 처음 만나 같은 고향 출신인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소속 정당이나 이념에 상관없이 금방 어울렸다. 아오지에서 둘의 집은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두 국군포로의 손녀
주 씨는 17살 때 중학교를 졸업하고 3년 동안 체신소에서 전화교환수로 일하다 2002년 20세 때 탈북했다. 주 씨의 집안은 아오지의 상징이기도 했다.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형제 다섯 명과 어머니 남형제 다섯 명 모두 아오지 탄광 노동자였습니다.”

주 씨는 국군포로의 손녀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경북 영양 출신의 1936년생 주신호 씨, 외할아버지는 서울 종로 인사동 출신의 1924년생 김경찬 씨였다. 그러나 주 씨는 어렸을 때 두 할아버지가 국군포로 출신인 사실을 몰랐다. 그는 북한군에 자원한 의용군 출신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사실 국군포로들은 모두 북에서 의용군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두 할아버지가 국군포로 출신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죠. 외할아버지는 전쟁 때 포로가 돼 소련까지 끌려가 수감생활을 했고 가끔 이런 저런 추억담을 남겼어요.”

6.25 전쟁 직후 포로 교환이 시작되자 북한군 수용소 관리자가 포로들에게 “남쪽으로 돌아갈 사람은 나오라”고 소리쳤다. 김경찬은 눈치를 보며 서있었지만 용감한 몇몇이 대열 앞에 나섰다. 북한군은 이들을 그 자리에서 모두 총살했다. 더는 남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남은 이들은 북부 탄광들에서 일하는 노동력으로 투입됐다.

김 씨는 인사동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해방 전에는 유도선수도 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국군 장교 출신이었던 것 같아요. 역시 국군 장교로 참전한 남동생이 남쪽에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북한은 전쟁이 끝나 병사 출신은 온성군 상화탄광 등에 보냈지만 장교 출신은 모두 아오지에 보냈거든요.”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집안은 남쪽 어딘가에 있겠지만 주 씨는 찾지 못했다.

“이산가족상봉센터라는 곳을 찾아갔는데 ‘친척을 찾아도 만나길 거부하면 상봉이 불가하다’는 말을 강조하는 바람에 그냥 돌아 나왔어요.”

#아오지의 10살 꽃제비
일러스트레이션 박로사 디지털뉴스팀 인턴
일러스트레이션 박로사 디지털뉴스팀 인턴
조 씨는 아오지의 ‘소년 꽃제비’였다.

“1998년에 엄마가 가족을 살리겠다고 먼저 탈북을 했어요. 엄마와 연락이 끊겼던 1998년부터 2000년 사이 저는 시장에서 아버지 몰래 먹을 것을 얻어먹는 꽃제비 생활도 했죠.”

2000년 중국에 갔던 엄마가 돌아왔다. 그리고 아들을 데리고 다시 탈북했다.

조 씨를 데리고 간 곳은 중국 옌벤(延邊) 조선족자치주 옌지(延邊) 시였다. 엄마는 그를 교회에 맡기고 위험한 국경 지역을 떠나 돈을 벌려 다른 곳에 갔다. 교회에는 부모를 따라 탈북한 10대 청소년이 3명 더 있었다. 교회의 도움으로 이들은 학교도 다녔다.

그러나 이 생활은 2년 뒤에 끝났다. 누군가의 신고로 체포돼 북송됐다. 그때가 14세였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며칠 동안 보위부에 갇혀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2년 동안 북에서 살았는데, 엄마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그 사이 엄마는 한국에 도착해 있었다.

“아버지가 북에서 둘이 같이 살자며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엄마가 말했어요. 여기 오면 대학까지 공부를 시켜준다고. 저는 정말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아오지에 있으면 대학은 꿈도 못꾸거든요.”

생활 형편 때문에 조 씨는 인민학교(초등학교)를 2년 밖에 다니지 못했다. 북송된 뒤 중학교에 입학해 2년 더 다녔지만 기초가 보족해 따라가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찾아 집을 떠났다.

#아오지의 추억
주 씨가 기억하는 아오지는 ‘검은색, 암모니아 냄새, 시신들’이었다.

기압이 낮은 날 아오지는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매캐한 석탄 연기로 가득 찼다. 집집마다 연소가 잘 안되는 석탄을 땔감으로 사용한 탓이었다.

“하얀 옷을 입을 수가 없었어요. 샌들을 신고 나가면 발이 금방 새까매져요. 석탄을 원료로 질안 비료를 생산하는 ‘7.7연합기업소’가 옆에 있었는데 거기서 암모니아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죠.”

고난의 행군 시기 아오지에선 굶어죽은 시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1997, 98년에 (아사자가) 제일 심했어요. 2000년까지 아오지에서 제일 큰 오봉시장에 가면 꽃제비 시신을 심심치 않게 봤는데 그나마 제가 탈북하기 전에는 많이 나아졌죠.”

그 당시 아오지에선 석탄을 캐내지 못했다. 모두가 굶주려 일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탄광마을에서 폐타이어를 땠다. 새까만 찌꺼기가 하늘에 흩날렸다. 당시 북한은 쓰레기 처리를 해주는 조건으로 외국에서 돈을 받고 폐타이어와 플라스틱 등을 대량으로 들여와 아오지 등에 버렸다.

조 씨가 덧붙였다.

“저는 시신을 본 기억이 없어요. 꽃제비 때 시장에 가면 누워있는 사람들을 봤죠. 그때는 10살~12살 때라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저 사람들은 자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죽은 사람들일 수도 있겠네요.”

조 씨는 북송된 뒤였던 2002년부터 2004년 사이가 아오지에선 제일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아오지 하면 그때 친구들과 강가에서 고기를 잡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모래무지, 세치네(민물고기의 함북 방언), 민물조개 등을 잡아 어죽을 만들어 먹었죠.”

#아오지의 탈북 정신
주 씨는 20세 때 탈북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 나진 쪽으로 100리가 넘는 길을 식량 배낭을 메고 걸어가 장사를 다녔다. 가끔 길에서 장사하려 나오는 중국 화물차를 얻어 타기도 했다. 당시엔 외국인과 접촉하면 보위부에 끌려가 구타를 당하고 돈도 다 빼앗길 때였다. 주 씨도 한번은 체포돼 끌려갔다. 보위부 건물에서 여직원이 주 씨의 옷을 벗기고 속옷까지 꼼꼼히 뒤졌다. 위안화가 나오면 바로 압수해 보위부가 나눠가진다. 그게 당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었다.

“어느 날 또 중국에서 나오는 화물차를 얻어 타려고 두만강 세관 옆길 도랑에 숨어있었는데 밤에 보위원이 단속하려 나왔어요. 두만강 강둑까지 정신없이 도망쳤죠. 강둑으로 다시 올라가다 경비대에 체포될까 두려웠어요. 그럼에도 죽을 힘을 다해 평소 동경하던 중국으로 넘어왔죠.”

그렇게 도착한 중국에서 주 씨는 6년을 살았다.

“그 당시에는 한국으로 갈 생각이 없었어요. 할아버지들이 어렸을 때부터 ‘우린 죄를 지으면 남보다 몇 배 더 큰 처벌을 받으니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계속 이야기한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주 씨는 2008년 중국에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벌어져 앞집과 뒷집에 살던 친한 탈북 여성들이 북송되는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터넷으로 한국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베이징으로 갔다가 라오스 국경 옆 쿤밍을 거쳐 홀로 라오스 국경을 넘었다. 브로커의 안내도 없이 스스로 인터넷에서 정한 루트였다.

“그때 인터넷에서 탈북자들이 국경을 넘는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사람들이 정글을 헤쳐 라오스로 가더군요. 나도 그렇게 가면 되겠다 싶었죠.”

온밤 빽빽한 정글을 헤치며, 보지도 못했던 벌레와 짐승을 쫓으며 국경을 넘었다. 주 씨의 나이 26세 때였다. 그는 라오스에서 경찰에 체포됐지만 북한이 가난한 덕분에 살아났다.

“라오스에서 북한 대사관에 연락했어요. 당시 외국인을 체포해 넘겨줄 때마다 라오스 정부는 500달러를 받았어요. 그런데 북한 대사관이 돈이 없어 넘겨받지 못했어요. 제가 라오스 경찰과 흥정을 벌였죠.”

결국 라오스 경찰은 한국 정부에 돈을 요구한 뒤 그를 넘겨줬다.

조 씨도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다. 3개월 동안 중국과 베트남을 거쳐 캄보디아까지 찾아갔다. 그런데 캄보디아에서 한국인 브로커가 돈을 더 주지 않는다고 조 씨 일행을 프놈펜 북한 대사관에 넘겼다. 꼼짝없이 북송될 상황이었다.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저희를 조사하더니 현지 외국인 감옥으로 인계하면서 3일 뒤 오겠다고 했어요. 엄마를 볼 수 없다니 앞이 막막했죠. 다행히 몰래 숨겨온 위안화가 있어 그걸 간수에게 주고 한국에 있는 엄마와 통화를 했어요. 엄마가 외교부와 통일부를 오가며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하더군요.”

물밑에서 어떤 외교적 노력이 오갔는지, 아니면 아무 노력도 없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3일 뒤에 오겠다고 한 북한 대사관 직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18일째 되던 어느날 새벽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그들을 인계 받은 뒤 한국행 비행기에 태웠다.

#냄새부터 달랐던 한국
주 씨는 인천국제공항에 처음 도착했던 2008년 4월 19일을 이렇게 기억한다.

“냄새부터 달랐어요. 아오지에서 중국, 라오스, 태국까지 거쳐 오는 동안 모든 나라의 냄새가 다 달랐어요. 그런데 인천에선 참 좋은 냄새가 났어요. 날씨도 너무 따뜻했죠. 할아버지가 남쪽은 참 따뜻하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기쁨도 순간. 같은 비행기를 탄 탈북민들이 비상통로로 나오는 것을 보던 한 공항 직원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저 사람들(탈북민)은 왜 이렇게 많이 들어오느냐”는 말이 귀에 들렸다. 국가정보원 직원이 급히 다가가 그 직원을 말렸다.

조사기관으로 들어오는 도로 옆에 푸른 나무도 주 씨에겐 인상 깊었다.

“잘 사는 나라는 나무도 살쪄 있구나.”

조사를 맡은 여성 조사관이 “대한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첫 인사를 건넬 때만해도 가슴이 설렜다. 그런데 다음 말부터 바로 반말이었다.

“야, 너 몽골에 갔지?”

“아니요.”

“거짓말할래. 너를 본 사람 있어.”

당시 만 해도 옆방에서 취조를 당하던 탈북 남성이 폭행당해 비명소리가 들려오던 시절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했던 남성은 주 씨의 표현대로라면 발로 ‘짓뭉개졌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인권감독관 제도가 도입되는 등 이런 관행이 거의 사라졌다.

하나원을 나온 주 씨는 회계사 자격증을 따고 한 종친회 사무실에서 일했다. 첫 월급은 90만 원이었다.

전임자는 150만 원을 받았는데 왜 나에겐 적게 주느냐고 하자 “전임자는 전문대를 나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주 씨가 열심히 계산해봤더니 대학 4년을 다니는 동안 벌지 못해도 인생 전체로는 월급이 더 많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2013년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2019년 성균관대 국정전문대학원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대학을 다니다 결혼을 했고 딸과 아들을 얻었다.

남편은 북한에서 해외로 유학 갔다가 탈북해 한국에 온 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해 현재는 의사로 일하고 있다. 평양 남자와 아오지 여자의 서울살이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일년 만에 초중고 검정고시 합격
대학에 보내준다는 엄마의 말에 설레어 2004년 9월 21일 한국에 도착한 조 씨는 처음부터 열심히 공부했다.

북에서 학교를 다닌 것은 고작 4년뿐이었지만 한국에서 초중고 검정고시 과정을 1년 만에 모두 통과했다. 이후 1년 동안 대안학교에서 입시 공부를 한 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에 07학번으로 입학했다. 그 뒤 열심히 공부만 했다.

대학 재학 중 1년 동안 미국에 연수를 다녀왔고, 2013년 졸업했다. 그해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외교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해 2년 과정을 마친 뒤 2015년 여의도에 있는 정치컨설팅 회사에 취직했다.

조 씨는 “처음부터, 지금도 나는 정치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2017년 말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실 인턴비서로 국회에 처음으로 입성했다. 2019년엔 김영춘 의원실 비서로 옮겨갔다. 올해 21대 총선 때는 부산진구 갑 선거구에 출마한 김 의원을 보좌하기 위해 지난해 연말부터 부산에 내려가 살았다. 그러나 김영춘 의원은 선거에서 패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김 전 의원이 국회 사무총장으로 임명됐다. 조 씨는 다시 그의 비서로 들어가 일하고 있다.

#이념을 넘어

조 씨가 더불어민주당 의원 비서로 들어간 건 정치적 견해 때문이었다.

“저는 배고픈 사람에겐 이념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빵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어린 나이에 꽃제비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더는 없어야 하죠. 그러다보니 김정은 체제를 지금 당장 제거할 수 없다면 교류협력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미치고 북한 사람들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정치 활동으로 구현하고 싶었어요. 북에는 아버지와 친구들이 있습니다. 저의 꿈은 당당하게 휴전선을 넘어 좋은 소식을 들고 북에 가는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민주주의 시스템의 제대로 된 버전을 북에 전하고 싶습니다.”

주 씨가 미래통합당 지성호 의원실에 들어온 것은 인권 때문이었다.

“지 의원과 2012년에 만나 8년 동안 북한 인권문제를 이슈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의원실에서 함께 보조를 맞추고 있고요. 할아버지 때부터 저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수난이 다시는 이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10세에 꽃제비가 돼 아오지 시장을 헤맸던 청년은 ‘배고픈 아이들에겐 이념보단 빵이 먼저’라는 신념으로 남북이 오가는 통로를 하루빨리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어 한다.

국군포로의 가족으로 아오지에서 비참한 삶을 대물림했던 청년은 북에 남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 때문에 북한 인권에 평생을 바치려 하고 있다.

비록 몸을 담은 정당은 다르지만 이들의 가슴에서 뛰고 있는 ‘북에 남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의 피’는 온도가 같았다.

“북한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북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더 절실한가.”

아오지에서 대한민국 정치의 심장 국회까지 긴 여정을 헤쳐 온 두 남녀는 앞으로도 이 질문의 해답을 찾아 평생의 여정을 이어갈 것이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