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 교체’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대권 행보에 나선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3일 국립서울현충원 참배로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반 전 총장은 이날 청년, 서민과의 소통에 집중하며 ‘미래 지향적 지도자’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자신의 약점으로 꼽히는 청년층의 표심을 1차 공략 목표로 삼은 셈이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정권 교체’ 여론을 등에 업고 야권 주자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이날 발표된 한국갤럽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문 전 대표는 31%로 반 전 총장(20%), 이재명 경기 성남시장(12%) 등과 격차를 더 벌렸다. 》
김치찌개 점심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가운데)이 13일 서울 동작구의 한 김치찌개 식당에서 청년들과
점심식사를 함께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반 전 총장은 이날 대학생 창업가, 취업 준비생 등의 고민을 듣고 복지와 실업률 등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초기 대선 구상은 변화와 희망을 강조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벤치마킹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전날 반 전 총장의 귀국 일성은 ‘젊은이의 꿈’과 ‘광장의 여망’이었다. 이어 13일에도 청년 및 서민과의 소통에 주력했다. ‘보수 정권의 연장’이나 ‘고령 후보’ 프레임을 극복하고 자신의 최대 약점인 20, 30대를 우선 공략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친 것이다.
반 전 총장은 이날 주민등록 신고를 하러 방문한 서울 동작구 사당3동 주민센터에서 “정치 지도자들은 체감 실업률이 20% 이상 되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해결해야 한다”며 “유엔 경험으로 젊은이들의 길잡이가 되겠다.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이 희망을 갖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워킹맘과 취업준비생, 대학생 창업자 등을 초청한 ‘번개 점심’ 회동에선 창업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청년에게 “정책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반 전 총장은 청년들의 말에 일일이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며 공감을 표했다. 육아 고민을 꺼낸 워킹맘에겐 “내 딸도 직장을 다니다가 결혼해 가정주부로 남았다”고 공감을 나타냈다. 취업준비생이 ‘스펙 경쟁’의 고충을 토로하자 “시골에서 살다가 대학을 와 보니 사교육을 받은 동창생이 많아 놀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러 차례 희망과 용기를 강조했다.
‘변화(Change)와 희망(Hope)’은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내건 대선 슬로건이다. 당시 이 슬로건은 글로벌 금융위기와 이라크전쟁에 지친 미국인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반 전 총장은 임기 10년 중 8년을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하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반 전 총장이 귀국 연설 당시 좌우를 응시하고 ‘용기’와 같은 특정 단어를 거듭 강조한 것은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 스타일과 유사한 면이 많다”며 “‘연륜을 갖춘 오바마’ 전략을 구사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역대 대선을 살펴보면 젊은층의 ‘롤 모델’이 누구인가가 중요했다”고 했다.
이번 대선에선 탄핵 정국으로 정권 교체의 열망이 큰 데다 촛불시위를 주도한 20, 30대의 투표율도 어느 때보다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보수층의 지지만으로는 승산이 낮다는 얘기다. 반 전 총장이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표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자신의 전문 분야인 외교안보 문제에 앞서 경제와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높인 것도 전략적 행보라는 관측이다. 일각에선 반 전 총장의 초기 행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 여권 인사는 “아직 보수층의 확고한 지지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 ‘나는 보수가 아니다’며 중도를 표방하면 자칫 집토끼마저 잃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반 전 총장은 이날 첫 일정으로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그는 방명록에 “지난 10년간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세계평화와 인권 및 개발을 위해 노력한 후 귀국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더 큰 도약을 위해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썼다. 이어 현충탑에 분향·묵념하고 안장된 순서에 따라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 순으로 묘역을 참배했다.
● 문재인, 지지율 30% 첫 돌파
“선거 연령 18세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앞줄 가운데)가 13일 서울 마포구의 한 상가에서
열린 ‘함께 여는 미래, 18세 선거권 이야기’ 간담회에 참석해 선거연령을 만 18세로 낮추자는 피켓을 들고 있다. 문 전 대표는
“유관순 열사가 3·1독립운동에 나설 때가 만 17세였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한국갤럽 조사에서 지지율 30%를 돌파한 것은 2015년 이후 처음이다. 문 전 대표는 한 달 새 지지율이 11%포인트나 급등했다. 문 전 대표는 3자 대결 조사에서도 44%를 기록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30%), 국민의당 안철수 전 상임공동대표(14%)를 여유 있게 제쳤다.
문 전 대표의 상승과 이재명 성남시장의 하락에 대해 갤럽은 “상당 부분 민주당 지지층 내부의 선호도가 변동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 전 대표 측은 “이 시장이 6%포인트 하락하고 문 전 대표가 11%포인트 오른 것은 중도 성향과 ‘반(反)문재인’ 성향의 유권자들이 서서히 문 전 대표 지지로 돌아서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문 전 대표 측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호남 지역 지지율 상승이다. 이번 조사에서 문 전 대표의 호남 지역 지지율은 39%였다. 전날 발표된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40.3%였다. 당 관계자는 “야권의 텃밭인 호남은 언제나 문 전 대표의 최대 고민이었다”며 “1위 후보에게 지지가 쏠리는 ‘밴드 왜건 효과’가 호남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 전 대표 측은 앞으로 정책 행보를 강화하면서 대세론을 굳히겠다는 계획이다. 문 전 대표는 설 연휴 전까지 일자리 문제, 남북 관계 등을 주제로 차례로 토론회를 열고 관련 공약을 발표할 예정이다.
문 전 대표는 13일 서울 마포구에서 선거 연령 인하와 관련된 간담회를 마치고 기자들과 만나 “정권 교체를 말하지 않고 정치 교체를 말하는 것은 그냥 박근혜 정권을 연장하겠다는 말”이라고 전날 반 전 총장의 귀국 일성을 비판했다. 반 전 총장이 자신을 ‘진보적 보수’라고 한 것에 대해서도 “지금 상황은 진보 보수 또는 좌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정권 교체를 통해서만 국가 대개조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문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 “선거제도를 가진 나라 가운데 93%가 선거연령이 18세 이하이고 북한도 17세”라며 “(한국의 선거연령) 19세는 세계적으로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다만 다른 야권 대선 주자들이 반 전 총장을 노골적으로 견제하는 것과 달리 문 전 대표는 반 전 총장에 대한 직접적 비난은 자제하는 ‘전략적 무시’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한 친문(친문재인) 진영 의원은 “문 전 대표가 반 전 총장과 대립각을 세우면 반 전 총장만 띄워 주는 결과가 된다”고 설명했다. 문 전 대표는 14일 외곽 지원 단체인 ‘더불어포럼’ 창립식을 열면서 세 확산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포럼에는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 등이 참여한다.
당 안팎에서는 문 전 대표의 지지율 상승세 지속 여부는 반 전 총장에게 달려 있다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중도 성향의 한 의원은 “앞으로 열흘 정도가 반 전 총장 귀국의 ‘컨벤션 효과’가 극대화하는 시점”이라며 “이 기간의 지지율 변동이 문 전 대표와 반 전 총장 간 1라운드 격돌이 될 것”이라고 했다.
또 시작부터 삐걱대고 있는 당 대선 후보 경선 규칙 협상 등 비문(비문재인) 진영의 반발을 부를 수 있는 변수들도 남아 있다. 이날 이종걸, 변재일 의원 등 비문 진영 중진 의원들은 추미애 대표와 면담을 하고 민주연구원의 개헌 저지 보고서 파문에 대한 당의 대응이 미흡하다는 우려를 전달했다.
문병기 weappon@donga.com·송찬욱 기자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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