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달 25일 그룹 지배구조 개편을 포함한 혁신 방안을 발표했다. 핵심은 올 6월 검찰의 롯데그룹 압수수색 후 무기한 연기됐던 호텔롯데 기업공개(IPO) 재추진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면세점 탈환을 위한 정치권 로비 의혹에 대해 검찰이 수사에 나서면서 호텔롯데 상장 계획은 또다시 안갯속에 빠졌다. 특히 올해 들어 12차례나 압수수색을 당하면서 호텔롯데 IPO를 위해 올 5월 계약을 맺은 주관사 중 해외 업체 한 곳은 이미 계약 포기를 고려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죄 여부를 수사하는 검찰이 대기업으로 칼날을 겨누면서 기업 경영활동에 ‘빨간불’이 켜졌다. 특히 삼성, SK, LG, 한화 등 해외 사업 비중이 큰 기업들은 최고경영자(CEO) 리스크로 사업 파트너나 투자자들이 동요하고 있다. 기업이나 경영진이 뇌물죄 적용을 받을 경우 미국 해외부패방지법(FCPA)의 타깃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 해외에서 켜진 비상 깜빡이
삼성그룹은 이달 들어서만 세 차례나 검찰 압수수색을 받았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24일 “사실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에 돈을 출연한 데 대한 수사를 받을 때만 하더라도 해외 주요 주주들의 불안감이 크지 않았다”며 “그러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검찰에 몇 번씩 불려 가고 국정조사를 받는 모습까지 생중계되면 ‘CEO 리스크’로 인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파트너들과의 사업계획 차질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현대자동차그룹 관계자는 “안정적인 물량 공급이 가능한지 확인하려는 딜러들의 문의가 빗발치는데 제대로 답변을 할 수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중요한 계약이나 파트너십 체결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문제가 터지면 대부분 ‘CEO 문제가 완전 해결될 때까지 미루자’는 반응이 나온다”고 전했다.
기업들은 특히 다음 달 6일 총수들이 한꺼번에 불려나와 조사를 받는 모습이 TV 전파를 타게 되면 해외에서의 브랜드 이미지 추락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정조사를 통해 ‘한국 기업들은 부패 집단’이라는 인식이 커질 경우 해외 사업에서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 미국 반(反)부패법 적용 우려도
검찰이 기업들이 각종 대가를 바라고 박 대통령의 민원을 들어줬다고 결론 내리면 미국 정부가 해외부패방지법(FCPA)을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FCPA는 기본적으로 미국 회사가 해외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거나 회계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다. JP모건은 사업에 도움을 받기 위해 중국 고위 관리층 자녀 100여 명을 채용한 것이 덜미가 잡혀 최근 2억 달러(약 2360억 원)의 벌금을 물었다. 그러나 FCPA로 미국에 현지법인을 둔 외국 회사를 처벌하는 경우도 많다. 2008년 뇌물 스캔들에 휘말린 독일 지멘스가 미국 법원에 8억 달러의 벌금을 낸 게 대표적이다.
FCPA 처벌을 받은 기업은 천문학적 과징금을 내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 조달시장에서 완전히 퇴출된다. 미국 내 기업과의 인수합병(M&A)도 힘들어진다. 현재 부패방지법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 영국, 중국, 인도, 브라질, 터키, 아일랜드, 이스라엘 등이다.
문형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 정부의 경우 FCPA를 최근 매우 공격적으로 적용하고 있어 수사 대상 기업들이 미국에서도 상당한 법적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며 “사실관계가 철저히 밝혀져야겠지만 ‘아니면 말고’ 식 수사는 국가적 손실을 초래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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