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승부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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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여(與) 막장드라마 ‘옥새의 후예’가 ‘태양의 후예’보다 훨씬 재밌다.” 새누리당의 공천 갈등이 인기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하다는 누리꾼들의 비아냥거림이다. ‘물 만난 철새들’의 정당 갈아타기도 볼썽사나웠다.

각설하고 이제 후보자들은 막말과 인신공격성 발언 대신 정책과 비전으로 승부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유권자들의 표심(票心)을 잡는 지름길 아니겠는가.

‘승부(勝負).’ 이김과 짐을 뜻한다. 한때 승부의 일본어 발음인 ‘쇼부’라고 하는 이도 많았다. 허나 요즘엔 쇼부를 입길에 올리는 이는 드물다. ‘승부’ ‘흥정’ ‘결판’ 등에 밀려났기 때문이다.

‘승부하다’라는 말이 재미있다. 우리 말법은 ‘승부’에 접사 ‘-하다’를 붙인 꼴을 인정하지 않는다. 승리와 패배를 아울러 이르는 ‘승패(勝敗)’도 마찬가지. ‘승부가 나다’ ‘승부를 내다’ ‘승부를 걸다’ ‘승패를 가르다’ 등의 형태로 써야 한다. 근데 많은 이가 ‘정책으로 승부해야’ ‘참신한 인물로 승부하는’ 식으로 쓴다. ‘승패하다’와 달리 ‘승부하다’는 어느새 입말로 자리 잡은 것. 그러고 보니 승부하다를 인정 못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근거하다’ ‘기초하다’ ‘토대하다’ 등 언중의 말 씀씀이에 힘입어 사전에 오른 예도 있다.

승부 하면 떠오르는 낱말이 있다. ‘진검승부(眞劍勝負)’다. 진검은 나무로 된 칼이 아닌 ‘진짜 검’이다. 진짜 검으로 하는, 그래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승부가 진검승부다. 일본어 ‘신켄쇼부’에서 왔다. 국어원은 1997년 진검승부를 ‘생사겨루기(정면대결, 최종대결)’로 다듬었다. 결과는? 생사겨루기는 잘 쓰이지 않는다. 그 대신 정면승부, 정면대결, 한판 승부, 한판 대결, 맞대결 등이 상황에 맞게 쓰인다. 요즘 들어 ‘사생결단식 적대 정치’, ‘사생결단식 싸움’ 등 사생결단(死生決斷)이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진검승부라는 말도 진검이 풍기는 섬뜩함과 말맛이 강해서인지 여전히 많이 쓰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진검승부는 외래어를 우리 음으로 바꿔 사용하는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20대 총선 선거운동이 오늘부터 시작된다. 일부에서는 정치권에 염증이 나서, 기권도 의사표시라며 투표를 안 하겠다는 말을 한다. 그렇더라도 투표장에 가 의사표시를 해야 정치가 바뀐다. 조금이라도 더 민생의 아픔을 헤아리는 선량(選良)을 뽑아보자. 지금부터가 승부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새누리당 공천 갈등#승부#진검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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