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2심이면 충분” 상고심 엄격 제한… 중대사건만 다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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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의 대법원, 갈 길을 묻다]<3·끝> 상고남발 막을 방법 없는 유일한 나라, 한국

“개인과 개인 사이의 정의를 세우는 데는 두 번의 재판이면 충분하다. 세 번째 재판(상고심)은 그 사건에서 누가 이기는가보다는 더 높은 차원의 문제가 관련된 경우에 한정해야 한다.”

미국 27대 대통령을 지낸 10대 연방대법원장 윌리엄 태프트(1857∼1930)가 남긴 법언이다. 미국 상고심의 역사는 태프트 연방대법원장 이전과 이후로 나눌 정도로 그는 미국 사법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 선진국, 상고심 개혁으로 국민 기본권 확립

취임 첫해 그의 상고심 개혁 의지는 단호했다. 당시 상고심 재판에 걸리는 평균 시간은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5년. 대법원이 사건 더미 속에 파묻혀 있다가는 국가와 국민에게 중대한 의미가 있는 판결을 놓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의회를 설득해 ‘상고허가제’를 처음 도입했다.

이후 재판의 홍수로부터 해방된 미 연방대법원은 미란다 원칙 고지, 1인 1표제 허용, 흑백 차별 철폐 등 기념비적인 판결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지금도 연간 상고허가 신청사건은 1만 건을 넘지 않으며 70여 건만 전원합의 판결의 대상이 된다.

상고심 사건 폭증 문제는 민주적 사법체계를 운영하는 나라들이 모두 경험한 일이다. 미국 독일 등 사법 선진국들은 다양한 제도 개선으로 풀어냈고, 대법원이 ‘최고 정책법원 기능’과 ‘사법서비스에 대한 국민의 만족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상고허가제는 이 가운데 가장 일반적이고 이상적인 방안으로 손꼽힌다. 미국은 상고허가신청이 들어오면 ‘룰 오브 포(Rule of 4)’, 즉 9명의 대법관 가운데 4명이 동의해야만 대법원의 상고심이 열린다. 이 중 98% 정도가 만장일치로 기각된다고 한다. 대니 전 미국 뉴욕 주 브루클린지원 형사수석부장판사는 “미국 국민에게 연방 대법원은 국민의 인권을 확실히 표현해줄 수 있는 곳이며 공권력의 기본권 침해를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 뚜렷하게 표현해주는 기관이라는 믿음이 있다”고 말했다.

영국은 2009년 대법원을 새로 설치하면서 기존에 있던 상고허가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일반 공중에게 중요한 법적 쟁점을 포함하고 있어 대법원이 심리해야 한다고 인정할 때 상고를 허가한다. 독일은 민사사건에 2002년부터 상고허가제를 전면 적용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독일은 2002년 이후 폭발적 증가세를 보이던 상고심 사건 접수가 2004년 3633건, 2011년 3357건으로 진정 추이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웃 나라 일본은 상고심 사건 수가 우리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만 최고재판소로 올라오는 사건을 선별하는 ‘상고수리제’를 운영하고 있다. 헌법 위반이나 기존 판례에 저촉될 때는 상고가 인정되지만 그 외에는 중요한 법령 해석이 쟁점이 될 때만 최고재판소 재량으로 상고 수리 여부가 결정된다. 이호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상고수리제가 도입된 이후 일본은 최고법원으로 가서 모든 것을 끝낸다는 의식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 대법원이 제 역할 하면 국민 전체 권리 증진

우리나라에도 최고법원인 대법원의 기능을 강화하면서도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까지 보장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다.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려는 것이냐” “대법원이 ‘힘 있고 돈 있는 자’의 사건만 처리하겠다는 말이냐”는 우려가 나왔기 때문이다.

상고허가제는 1981년 도입됐지만 권위주의적 발상 아래 시행됐다는 국민 불신으로 1990년 폐지됐다. 이에 앞서 고등법원에 상고부를 둔다는 논의도 진행된 적이 있었지만 이 역시 소송가액을 기준으로 사건을 나누다 국민 법감정에 맞지 않아 철회됐다. 대법원 관계자는 “결국 한국은 ‘상고남발 필터링’ 제도가 없는 사실상 유일한 나라가 돼 버렸다”고 지적했다. 상고에 부적합한 사건을 종결하는 ‘심리불속행 기각’ 제도가 있지만 기록을 검토한 다음 결론을 내기 때문에 큰 효과는 없는 실정이다. 한 전직 대법관은 “당시 대법관들이 여러 전원합의 판결로 국민 권익을 보호하는 판결을 내렸다면 ‘상고허가제’가 불신을 받고 제도가 폐지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국민 기본권 신장에 나서지 않은 대법원과 역대 대법관들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실패를 경험했지만 이제는 한국 사회의 전체 기본권을 보장할 수 있는 선진 사법시스템을 마련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때가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조계 관계자는 “‘미란다 원칙’의 주인공 미란다는 밤길에 여성을 뒤따라가서 성폭행하거나 미수에 그친 연쇄 성폭행범이었다”며 “어찌 보면 단순 성범죄에 불과한 사건에서 중요한 형사 절차적 의미를 찾아낸 것은 미국 연방대법원이 최고법원으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나리 journari@donga.com·신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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