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시대-인사가 만사다]<2> 국정원장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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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딸랑-따끈따끈 정보만 올려… 대통령 입맛 맞추는 인물 안된다

2009∼2011년 북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건강 악화와 함께 이명박 정부 내에서는 ‘북한 붕괴 임박론’이 정설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지난해 김 전 위원장이 사망했지만, 김정은 체제로의 권력 승계는 순조롭게 이뤄졌고 여전히 북한 체제는 건재하다.

남북 관계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어느 때보다 긴박해지는 상황에서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에서는 무엇보다 국정원장 인선에 정권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지적이 많다. 국내외 정세를 망원경과 현미경을 갖고 종합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관은 국정원밖에 없기 때문이다.

① ‘정보의 정치화’ 막을 통찰력

“‘딸랑딸랑 정보’와 ‘따끈따끈 정보’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통찰력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전 국정원 고위 간부 A 씨에게 박근혜 정부의 첫 국정원장이 갖춰야 할 자격을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딸랑딸랑 정보는 정권의 국정 운영 방향과 정책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해 주는 거고, 따끈따끈 정보는 정권의 관심사만 보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명박 정부의 ‘북한 붕괴론’이 딸랑딸랑 정보와 따끈따끈 정보에 의존한 정보 관리 실패 사례다. 대북 강경책을 썼던 이명박 대통령의 입맛에 딱 맞는 보고였던 것이다.

A 씨는 이런 정보만 판치게 되는 상황을 ‘정보의 정치화’라고 규정했다. 국정원장은 한반도 정세를 편견 없이 균형 있게 볼 식견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다음 국정원장은 대북정책이 잘못됐다고 판단하면 과감히 수정 의견을 낼 수 있는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A 씨는 “현 정부의 국정원은 김정은 체제의 미래, 한반도 주변 환경의 변화, 통일과 같은 거시적 트렌드를 분석할 정보를 생산하지 못한 채 현안에만 급급했다”라며 “한반도에 닥칠 위기 요인을 분석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도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 정치공작 용납 안되는 시대… 대통령의 측근 앉히지 말아야 ▼


《 역대 정부를 들여다보면 코드 인사, 낙하산 인사, 회전문 인사 등 인사 실패가 대통령과 국정 지지도의 하락으로 이어지고 국정 실패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집권 초기 인사에 정권 5년의 명운이 달려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동아일보는 ‘박근혜 시대―인사가 만사다’ 시리즈를 통해 국정 핵심 포스트에 어떤 능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 포진해야 하는지를 짚어 본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강조한 ‘대탕평 인사’도 인사의 원칙과 기본을 지킬 때 실현될 수 있다. ‘5년 명운 걸린 인사…ABC를 지켜라’라는 총론 제언(본보 22일자 A1·3면)에 이은 첫 번째 분석 대상은 ‘음지의 정권 2인자’로 불리는 정보기관 수장이다. 국가정보원은 이제 정치 공방의 원인 제공자나 대상에서 벗어나 정치 경제 안보 등 한반도에 닥칠 수 있는 위기를 종합적으로 관리해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평화의 시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

② 경륜 있는 정보 전문가

국정원 1차장을 지낸 염돈재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은 “30명의 국정원장 가운데 군 출신이 16명, 법조인 출신이 7명이었다. 정보를 전문으로 다룬 경험자는 김종필 이후락 씨 등 5명에 불과했다”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평균 재임 기간이 1년 8개월도 되지 않아 해외 정보, 북한 정보 등 다양한 업무를 소화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안보 부서 고위 관계자는 “정보 무경험자가 올 경우 집권 초기 대북 정보를 파악하는 데만 6개월”이라고 말했다. 국정원장 평균 재임 기간을 고려하면 3분의 1을 업무 파악에 낭비하는 셈이다. ‘정보라는 기차가 이미 달리는데 그제야 표를 끊어서 되겠느냐’라는 얘기다.

법조인 출신이 더는 국정원장을 맡아선 안 된다고 말하는 전문가도 많다. 노무현 정부 때의 고영구 김승규 원장, 이명박 정부 초기의 김성호 원장이 법조인 출신이다.

국가안전기획부 고위 간부 출신인 B 씨는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파견 근무한 경험이 있는 미 중앙정보국(CIA) 대테러팀장의 사례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FBI와 같은 법 집행기관은 테러 징후가 있어도 용의자를 실제 기소할 증거를 찾는 데 집중하지만 제한된 증거로 테러 감행 시나리오를 추론하거나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못 한다는 것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노무현 정부의 법무장관 출신인 김성호 원장의 경우 이명박 정부 집권 초기 촛불시위 과정에서 근거 없는 쇠고기 관련 괴담 대응에 무능력했다”라고 비판했다. 이명박 정부가 한때 “국정원장뿐 아니라 기획조정실장, 1, 2, 3차장 등 이른바 ‘빅 5’를 모두 외부 인사로 채워 국정원을 망쳐 놨다”라는 극단적인 평가(전직 국정원 고위 간부 C 씨)도 나왔다.

군인 출신이나 상원에서 오랫동안 정보 업무를 다룬 정보경륜가가 CIA 국장이 되는 미국을 참고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국제적 감각과 외교적 역량이 필수적이라는 제언도 나왔다. 반면 공식 교섭을 맡는 외교관은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③ 대통령 핵심 측근 NO!

전문가들은 “국정원을 정치 사찰, 정치 공작에 활용하는 시대는 이미 끝난 지 오래이기 때문에 대통령 측근을 기용할 이유가 없다”라고 입을 모았다. 전직 국정원 고위 관계자 D 씨는 “이 대통령이 원세훈 원장을 앉힌 건 국정원장을 정권의 관리자로 봤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대통령에 대한 로열티는 전문성과 겸비됐을 때 빛을 발휘한다’라는 지적도 있었다.

측근 기용으로 불거진 대표적 부작용으로 이번 대선의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 사건을 들기도 했다. 국가안전기획부 고위 간부 출신의 E 씨는 “지금은 국정원장이 선거에 개입하라고 지시할 수도 없는 구조임에도 ‘국정원은 대통령이 측근을 보내 자기 통치를 돕는 정치기관’이라는 견해가 만연해 이런 의혹이 확산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④ ‘다음 자리’ 생각 말라

전문가들은 “다음 자리를 탐하는 사람이 정보 수장이 되면 자리를 생각해서라도 정보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끊임없이 왜곡한다”라고 지적했다. 전직 국정원 고위 간부와 전문가들은 국회의원 출마를 모색한 김만복 전 원장을 주로 거론했다. D 씨는 “조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여러 문제를 일으킨 끝에, 국정원 내에선 내부 출신 원장이 40년 만에 나왔지만 김 전 원장 때문에 앞으로 영원히 국정원 내부 인사가 원장에 발탁되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까지 나왔다”라고 말했다.

한 국정원 직원은 “원장 말년에 자기가 염두에 둔 지역구 주민을 초대해 국정원 구경을 시켜 줬다는 얘기까지 들렸다”라고 말했다. 이 직원은 “국정원장 직은 커리어의 마지막이 돼야 한다.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국정원을 활용하거나 정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무리수를 두면 조직이 망가진다”라고 말했다.

⑤ 조직원이 신념 갖고 일하게 만들 리더

전문가들은 국정원은 수장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위계질서가 강한 조직이기 때문에 구성원을 압박하고 통제하기보다는 신념과 열정을 바쳐 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개방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다른 관계자는 “정보 분석가는 집적된 정보로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는 책임 있는 장인정신이 필요한데 인사처럼 일상적인 문제에 휩쓸리면 진짜 위기에 대처하지 못하는 조직문화가 생긴다”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가 이런 분위기의 만연으로 현 정부에서 발생한 정보 판단 실패 사례로 지목한 사건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이었다.

[채널A 영상] ‘고소영-코드 인사’ 과거 잘못된 사례 살펴보니…

윤완준·손영일 기자 zeitung@donga.com
#박근혜#국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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