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한국病이다]<5·끝>유권자도 책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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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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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100곳 돌면 민원 300개… “국회의원 아닌 군의원 된 기분”

#1. 영남에 지역구를 둔 한나라당 A 의원은 지역을 찾을 때면 술로 자주 인사불성이 된다. 의정보고회나 각종 행사에서 주민들이 주는 술을 거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A 의원은 “안 마시면 무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과거 직장생활을 할 때는 ‘말술’이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지금은 솔직히 힘들다. ‘술상무’나 하려고 국회의원이 됐나 하는 자괴감이 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2. 호남 지역구의 B 의원은 거의 매일 지역 주민들에게 취업 부탁을 받는다. B 의원은 “연간 200명 정도가 부탁한다. 그나마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지인이 많아서 최대한 노력하는데, 성사 확률은 잘해야 10% 정도다. 국회의원이 취업 대행업체도 아니고…”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당 C 의원은 “정원이 이미 꽉 찬 학원강좌를 듣고 싶다며 넣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있다”고 귀띔했다.

○ “지역 안 챙기니 당원까지 등 돌려”


18일 전남 담양군 봉산면 대추1리 마을회관. 정모 씨(57)는 민주당 김효석 의원(전남 담양-곡성-구례)에게 “모정(茅亭·쉴 수 있는 정자)이 하나 더 필요하다”면서 “용지를 포함해 2억 원이 든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군에서 용지까지 사준 사례는 없다. 또 국회의원의 몫이 아니고 군수가 해야 하는 일이니, 군수에게 전달하겠다”고 답했다. 김 의원은 이날 30분 간격으로 10개 마을을 돌았다. 김 의원은 “마을 100곳을 돌면 숙제(민원) 200∼300개가 쌓인다”고 말했다.

26일 서울 양천구 신월2동 한나라당 김용태 의원(서울 양천을)의 지역구 사무실. 김 의원은 이날 하루 접수한 부당해고 철회, 부부싸움 해결, 지역 동호회 임원진 갈등 해소 등 민원 37건의 처리 방안을 짜내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8월부터 매달 두 차례 구의원과 함께 ‘민원의 날’을 운영하고 있다. 2주 안에 민원처리 결과를 주민들에게 알려준다.

그는 지난해 6월 한나라당이 6·2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의정활동과 지역활동의 비중을 8 대 2에서 3 대 7로 바꿨다. 김 의원 측은 “중앙에서 활동하면서 지역은 소홀히 한다며 당원들까지 등을 돌리는 것 같아 활동무대를 확 틀었다”고 말했다. 같은 당 김종화 양천구 의원도 “유권자는 중앙에서만 활동하는 국회의원을 원치 않는다”고 단호히 말했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김용태 의원이 요즘 지역구 활동은 잘하는지 몰라도 상임위 활동은 뜸해진 것 같다. 우리가 과연 국정을 감시하는 국회의원인지 동네 민원 챙기는 게 주 업무인 군의원인지 헷갈린다”며 허탈해했다.

민주당의 한 재선의원은 “지역유지라는 사람들은 특히 자기과시가 심하다. 의원이 자주 찾지 않거나 전화를 하지 않으면 갖가지 험담을 하는 통에 수시로 챙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 소지역주의가 더 심각


여러 시군이 하나의 선거구를 이루는 복합선거구에서는 후보자가 어느 곳 출신이냐에 따라 선거에서 당락이 좌우될 때가 적지 않다. 유권자들이 소(小)지역주의에 따라 자기 동네 출신 후보자를 찍기 때문. 그러나 영남 지역구의 한 의원은 “출신지역만 챙긴다는 소문이 날까 봐 의도적으로 다른 지역을 더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부안 출신인 민주당 김춘진 의원(전북 고창-부안)은 “고창과 부안에 행사가 동시에 있으면 저는 고창으로 가고 아내는 부안으로 간다”며 “지역구가 3개인 군이 아닌 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무안 출신의 민주당 이윤석 의원(전남 무안-신안)은 “무안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당선됐다”면서 “신안을 의도적으로 더 챙길 수밖에 없다 보니 무안에서는 ‘신안만 더 챙기느냐’는 원망이 많다”고 말했다. 이래저래 두 지역에 매달리는 시간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 “유권자도 변해야 한다”


취재진이 현지에서 만난 주민들은 대부분 “국회의원이 동네 민원을 챙기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오히려 “좀 더 들어주지 않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나 양천구 신월6동 주민 김모 씨(31)는 “동네 민원을 국회의원에게 해결하라는 것은 억지”라고 말했다. 담양군 봉산면 와우3리 추모 씨(54)는 “국회의원이 지역구 활동에만 매달리면 상대적으로 의정활동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장훈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회의원은 지역에서 선출됐지만 지역의 좁은 이익을 대표하는 게 아니다”라며 “국회의원이 동네 민원의 포로가 돼 있는 한 국회 정상화는 어렵다”고 말했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과거에는 관청의 문턱이 높았으나 많은 부분이 개방적으로 바뀌었다. 시민들도 이젠 문제해결을 위해 국회의원을 찾기보다는 각종 민원 해결 경로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 선진국의 의정활동은 ▼
美-佛 의원들, 주중엔 의사당 주말엔 지역구 전념


워싱턴의 미 의회의사당은 매주 금요일만 되면 텅텅 빈다. 의원들은 금요일 오후 비행기를 타고 지역구로 가 월요일 저녁에 워싱턴으로 돌아온다. 의원들의 적극적인 지역구 활동을 배려하기 위해 월요일에는 의회 일정이나 관련 행사가 없다. 그 대신 주중에는 철저하게 의사당을 지킨다.

2년마다 의원을 뽑는 하원의 경우 당선되자마자 다음 선거를 위해 지역구 활동에 매달려야 할 정도로 지역구 활동은 민감한 이슈다. 중앙당이 공천권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지역 유권자들이 참여하는 프라이머리(예비선거)를 통해 후보가 결정되기 때문에 지역구를 등한시하기가 어렵다. 의원들의 모금행사도 대개 주말 지역구 활동을 통해 이뤄진다. 결혼식이나 상가(喪家)를 주로 찾는 한국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타운홀 미팅은 자신의 의정활동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특정 법안에 찬성한 이유와 반대한 이유를 소상하게 보고하는 자리다. 특히 정부 예산을 얼마나 따왔는지, 어떤 사업에 집중적으로 배정할 것인지는 주민들의 큰 관심사다. 일본 선거에서는 전통적으로 정당 대표 등 유력자의 바람몰이에 의존하는 고공 플레이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를 철저하게 지역구를 누비며 밑바닥을 훑는 선거방식으로 바꾼 인물이 오자와 이치로 전 민주당 간사장이다. 오자와 전 간사장은 2009년 총선에서 압승한 직후 140여 명의 자파 의원에게 “당분간 도쿄에 얼씬거리지도 말고 지역구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엄명할 정도로 지역밀착형 지역구 관리를 강조한다. 특히 세습의원 중에선 2, 3대에 걸쳐 수십 년간 충성도 높은 유권자를 확보하고 있는 정치인도 적지 않다.

프랑스 하원 의원도 주중에는 파리에 있다가 주말에 지역구에 가는 것이 공식처럼 돼 있다. 미국 의원들처럼 매주 금요일에 지역구로 가 월요일에 돌아온다. 월요일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의회가 열리지 않는다.<특파원 종합>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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