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모든 공식자료 ‘국가소유’ 명시

  • 입력 2008년 7월 10일 03시 00분


선진국에서는 대통령 재임 시절 통치 자료가 무단 유출되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다. 미국은 모든 공식 자료는 대통령 개인이 아닌 국가 소유임을 법에 명시하고 있고 영국은 통치 자료를 대법원장 책임 아래 관리한다. 사진은 정부 기록물을 보관하는 한국 국가기록원. 동아일보 자료 사진
선진국에서는 대통령 재임 시절 통치 자료가 무단 유출되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다. 미국은 모든 공식 자료는 대통령 개인이 아닌 국가 소유임을 법에 명시하고 있고 영국은 통치 자료를 대법원장 책임 아래 관리한다. 사진은 정부 기록물을 보관하는 한국 국가기록원. 동아일보 자료 사진
‘통치기록’ 외국선 어떻게 관리하나

샌디 버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빌 클린턴 행정부 후반인 1997∼2001년 미국 외교정책을 주무른 핵심 인사다. 그런 거물급 인사가 2003년 가을 워싱턴 근교 국립문서보관소의 대통령자료실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자료 상당수가 ‘일반인 공개 금지’로 분류돼 있었지만 그는 자료 열람을 허용해 달라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공식 서한을 제출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규정에 따라 그의 옆에는 문서보관소 요원이 항상 붙어 있었다. 그런 감시를 받으면서도 그는 자꾸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수상쩍은 행동을 했다. 수상한 행동을 보고받은 문서보관소 조사관이 먼저, 그리고 이어 검찰이 비공개 수사에 나섰다.

집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결과 그가 2003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클린턴 행정부의 테러 대비책을 평가한 정부 보고서 5쪽을 카피해 양말 속 등에 숨겨 반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의회의 9·11테러 조사위원회에 ‘클린턴 사람들’을 대표해 증인으로 나설 예정이었던 그는 “증언 준비에 참고하려다 실수로 갖고 나갔다”고 해명했다. 하드디스크는 건드리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는 자백감형제(Plea bargain·유죄를 인정해 형량을 줄이는 것)를 통해 벌금 5만 달러와 보호관찰 2년, 사회봉사 100시간을 선고받았고, 변호사 자격증도 자진반납 형식으로 포기했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통령 통치기록’ 절도 사건으로 당시 큰 파문을 던졌다.

기록과 자료의 보관 관리에 철저한 미국 영국 등 선진국에서 대통령 재임 시절 통치자료가 무단 유출되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라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미국은 1978년 제정된 ‘대통령 기록법(Presidential Records Act)’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은 물론 백악관 참모들이 다룬 모든 공식 자료는 대통령의 소유가 아니라 ‘국가 소유’임을 명시했다.

이 법과 행정명령에 세밀히 규정된 지침에 따라 국립문서보관소가 모든 권한을 갖고 ‘대통령 자료’를 관리한다.

대통령 자료는 대통령과 참모, 그리고 백악관의 실무 조직이나 개인이 대통령을 보좌하는 과정에서 나온 모든 공적 기록을 뜻한다. 다만 개인 일기, 대통령 본인이 당선된 선거 관련 자료 등은 ‘개인 자료’로 분류해 관리 대상에서 제외된다.

보관 5년 후부터는 일반인도 정보공개법 절차에 따라 열람할 수 있다. 하지만 전현직 대통령은 최장 12년까지 자료 공개 금지를 요청할 수 있다.

영국은 ‘공공기록법’에 따라 전자수단을 포함해 문자로 오간 모든 것을 공공기록의 범위에 포함시켜 대법원장 책임 아래 관리한다.

e메일을 포함한 전자기록도 관리 대상이다. 원본과 사본 사이에 차이가 없다. 전자기록은 종이기록에 비해 변조 등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관리에 특히 주의가 요구된다고 본다.

정부 기록은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대법원장은 개인도서관 등 다른 곳에 보관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도 그 장소가 특정 개인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일본은 총리의 통치자료 등을 포함한 공문서의 작성과 이관, 보관 등에 대해 ‘후진국’이라고 자체 평가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기록물 관리 수준을 높이기 위해 구성한 민간 전문가회의는 최근 총리에게 제출한 중간보고서에서 “미국은 고사하고 한국과 중국에도 크게 못 미친다”고 개탄했다.

일본의 국립공문서관은 상근 직원이 42명으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60분의 1, 한국 국가기록원의 3분의 1 규모다. 공문서 등 기록물의 관리, 보존, 이용 등 ‘라이프 사이클’ 전반을 규정한 법률조차 없으며 ‘통치자료’라는 개념 자체도 아직 분명히 정립돼 있지 않다.

일본 정부와 여당은 내년에 공문서관리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일반적인 통치자료가 아니라 관련 법률이나 규정에 따라 기밀로 분류된 자료를 퇴임 총리가 들고 나가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러시아에선 전직 대통령의 통치자료를 옛 소련 방식대로 관리하고 있다.

옛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는 공산당 서기장의 사망이나 실각 시 크렘린 안의 모든 문서를 문서고로 옮긴 뒤 문서 보관 기간이나 열람 범위를 정했다. 전직 공산당 서기장 등 최고위 간부들도 통치자료를 열람하기 위해서는 KGB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소련 붕괴 이후 KGB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이 통치자료를 관리하고 있다.

최근엔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집무 장면을 담은 비디오카세트가 대통령 전속 사진사 집에서 발견돼 파문이 일었다. 지난달 옐친 전 대통령의 전속 사진사였던 알렉산드르 쿠즈네초프 씨 집에서 옐친 대통령의 집무 장면을 담은 비디오카세트 600여 개가 발견된 것.

블라디미르 %첸코 전 대통령 의전서기는 “테이프가 사본이든 원본이든 모두 국가기밀이기 때문에 그대로 반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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