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쇄신책 뛰어넘는 ‘재협상 반전카드’ 나올수도

  • 입력 2008년 6월 3일 02시 55분


靑관계자 “인적쇄신으로 진정할 시점은 지났다”

재협상땐 FTA악영향-국가신인도 하락 부담 커

정부가 3일로 예정됐던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의 장관 고시의 관보 게재를 전격 연기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 집회 정국’을 대단히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여야에서 요구하고 있는 인적 쇄신만으로는 성난 민심을 진정시키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현 상황을 촉발시킨 쇠고기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정면으로 다뤄야 한다는 점을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이 대통령이 쇠고기 수입 재개 관련 재협상 또는 이에 준하는 추가협의를 미국 측에 요청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현 상황에서 일부 장관과 수석비서관을 해임한다고 민심이 ‘그만하면 됐다’고 돌아설지 미지수”라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과정에서 정부의 일방통행식 의사 결정이 비판의 핵심이라면 이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수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권의 또 다른 관계자는 “부분적 인적 쇄신으로 민심을 진정시킬 수 있는 시점은 이미 놓친 것 같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협상 요구 카드가 국내 사안이 아니라 미국과의, 그것도 최대 현안 중 하나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 대통령이 마지막 선택에 앞서 고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미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이 한미 FTA에 부정적인 가운데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재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조치가 나올 경우 한미 FTA의 미국 의회 비준 동의 가능성은 더 낮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여기에 외교적 결례를 넘어 상대국과의 사실상 ‘협정 파기’로 간주될 수 있는 만큼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국가신인도 저하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 쇠고기수입 재협상 가능성은

한미간 ‘정치적 타협’ 外대안 없어

국회 ‘30개월 이상 수입금지법’ 제정땐 정부 짐 줄어

“美, 재협상 수용해도 일부 내용 보완에 그칠 가능성”

2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에 대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고시의 관보 게재가 유보됨에 따라 한미 쇠고기 재협상이 가능한지에 촉각이 쏠리고 있다. 최근 미국산 쇠고기 반대 시위가 ‘쇠고기 안전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넘어 반정부 성격으로 치닫고 있어 정부와 여당의 정치적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져가고 있다. 미국의 시각에서도 한국 내 여론 악화가 쇠고기 판매는 물론 한미 관계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 ‘재협상 카드’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국제기준에 따라 양국이 합의한 쇠고기 협상을 뒤집을 과학적 근거를 확보하기는 쉽지 않아 재협상을 위해서는 한미 양국 간의 정치적 해법 이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재협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부와 미국 측은 국제수역사무국(OIE) 기준을 들어 쇠고기는 월령에 관계없이 광우병 특정위험물질(SRM)을 제외하면 안전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야당과 시민단체는 30개월 이상 쇠고기의 전면 수입 금지를 요구하며 재협상을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국가 간 신뢰를 깨는 일이기 때문에 재협상은 없다”는 방침을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재협상 가능성 자체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달 한미 쇠고기협상 추가협의 결과에 대한 브리핑에서 “새로운 과학적인 발견이 있거나 OIE에서 특별한 다른 결정이 있는 경우 등의 사정 변경이 생기면 재협상의 계기가 된다”고 밝혔다.

특히 장관 고시를 유보하면서 “재협상은 없다”고 확언해온 정부 당국의 기류에 뚜렷한 변화가 엿보이고 있다. 그간의 해법이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가능한 모든 수를 써야 한다는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하지만 자칫 ‘재협상 카드’가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기 때문에 숙고를 거듭하고 있다. 당장 국제기준을 뒤엎을 만한 과학적 근거를 확보하기도 쉽지 않고 재협상의 가능성을 열어줄 미국과 대만, 일본의 쇠고기 위생검역 협상 결과도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치적 타협이 재협상 변수

정부 일각에서는 “재협상이 무리라면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를 검역해 30개월 이상을 가려내 고시하는 방법으로 30개월 이상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을 덜어주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검역을 통해 30개월 이상 쇠고기를 가려내기 어려운 데다 미국과의 통상 마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미국 측의 합의도 필수적이다.

결국 현 상황에서 재협상을 하거나 국내 검역을 강화하더라도 양국 간의 정치적 타협이 필수적일 것으로 보인다. 한 정부 당국자는 “법리적 해석보다 한미 양국이 대승적 관계에서 정치적 타협을 할 경우 재협상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야권도 국가 간 협상 결과를 무조건 뒤집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재협상을 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상황’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통합민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등 야 3당이 발의한 30개월령 이상 쇠고기의 수입을 금지하는 ‘가축전염병예방법’ 개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한나라당이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같은 전략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장관 고시와 충돌할 수밖에 없어 필연적으로 재협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개정안을 입법부가 발의해 통과시킨다는 점에서 협상 파기에 따른 정부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계산도 깔고 있다.

미국 시각에서 ‘실리’로만 보면 30개월 이상 쇠고기의 비중이 큰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쇠고기의 85%가 30개월 미만 소에서 나온다. 또 이번 협상에 따라 30개월 이상 쇠고기가 수입되더라도 전체의 5%가 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2003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액 8400억 원을 기준으로 따지면 420억 원밖에 되지 않는 시장이다.

○미국 측의 반발과 반대급부도 걸림돌

하지만 미국 측이 ‘자국 국민이 먹는 것과 똑같은’ 쇠고기의 수출 금지 조항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 금지를 받아들일 경우 대만, 일본과의 쇠고기 협상에서 선례가 된다는 점도 미국에는 부담이다.

국제 협상 무대에서 한국 측의 위상 추락도 피할 수 없다. 한 정부 당국자는 “잉크도 마르지 않았는데 재협상을 요구한다면 어느 나라가 한국과 협상하려고 하겠느냐”고 말했다. 최악의 경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의 미국 의회 통과에 불똥이 튈 수도 있다.

설혹 미국이 한국 정부의 재협상 요구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미국 측이 이에 상응하는 한미 FTA 자동차 분야 재협상 등의 반대급부를 요구할 가능성도 높다. 미국 민주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은 “한미 자동차 교역은 불공정하다”며 한미 FTA 반대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들은 “양국 간 재협상 논의가 오고간 적이 없다”고 밝혔다. 한 소식통은 “만약 한국 정부가 재협상 요구를 하더라도 미국이 이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며 “만약 미국 정부가 재협상 요구에 응한다고 하더라도 일부 내용을 보완하는 정도에서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 관보게재 전격 유보 과정

농식품부, 어제 17시 “예정대로 3일 게재” → 한나라, 연기 요청

행안부, 인쇄 마친 관보 제본중지 → 농식품부, 19시 “고시 유보”

농림수산식품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조건 관련 고시(告示)를 3일 관보(官報)에 게재하려던 방침을 2일 오후 전격 유보한 결정적 계기는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의 요청이었다.

한나라당 임태희 정책위의장은 2일 국회에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관보 게재를 연기해야 한다는 당 소속 의원들의 주장이 잇따르자 이 같은 의견을 이날 오후 농식품부에 전달했다.

한나라당의 방침 선회는 과장 왜곡된 내용을 근거로 한 일부 세력의 선동 영향도 적진 않지만 현실적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결정 후 나타나는 사회적 반발이 큰 상황에서 예정대로 쇠고기 고시를 기정사실화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농식품부는 이날 오후 5시경까지만 해도 예정대로 3일 장관 고시를 관보에 게재한다는 방침이었다. 실제로 쇠고기 고시가 들어 있는 행정안전부의 관보는 이미 인쇄까지 마치고 제본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농식품부 당국자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 고시의 관보 게재를 유보하려면 명분이나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며 “고시 유보와 관련해 내부적으로 어떤 논의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농식품부는 오후 7시경 ‘고시 유보’를 전격 발표했다.

농식품부 고위 당국자는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볼 때 농식품부 차원에서 단독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최종적으로 이번 관보 게재 유보 결정이 정책적 차원을 넘는 정치적 차원에서 내려졌다는 뜻을 담고 있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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