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K 동영상’ 공갈 피의자들 정치권 잇단 접촉

  • 입력 2007년 12월 17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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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에 “100억 만들 생각” → 昌측에 “30억” → 한나라에 “100억 달라”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의 강연 내용이 담긴 동영상을 미끼로 30억 원을 뜯어내려 한 공갈미수범들은 경찰에서 배후나 추가 공범은 없으며 돈 때문에 범행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경찰은 이들이 8일부터 한나라당과 대통합민주신당, 무소속 이회창 후보 측을 잇달아 접촉했고, 일부 정치권 인사가 이들과 캠프 관계자와의 만남을 주선한 사실을 밝혀내고 배후 세력이 있는지 집중 추궁하고 있다.

또 이들이 누구를 만나 얼마를 요구했는지 등을 놓고 각 정당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펴고 있어 경찰은 휴대전화 통화기록 추적 등을 통해 이들의 행적을 밝힐 계획이다.

○ ‘빅딜’ 추진

공갈미수 혐의로 긴급 체포된 곽모(54) 씨가 대통합민주신당 정봉주 의원을 찾아간 것은 12일 오후 10시경.

경기도에 있는 대통합민주신당의 한 선거사무실에서 정 의원을 만난 곽 씨는 정 의원에게 2000년 10월 17일 이명박 후보가 광운대에서 한 특강 내용의 일부를 들려줬다.

곽 씨는 정 의원에게 “이걸로 100억 원 정도 만들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촬영 : 이종승 기자

정 의원은 곽 씨가 금품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고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를 뛰어넘지 못하는 내용”이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후보는 특강에서 “금년 1월에 BBK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 “BBK 투자자문회사는 금년에 시작했지만 이미 9월 말로 28.8% 이익이 났다” 등의 말을 했다. 하지만 정 의원은 당시 이런 내용을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공갈미수범들이 한나라당 박모 특보를 만나 ‘정 의원이 30억 원에다가 추가로 (상황을 보고) 알파를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며 대통합민주신당과 이들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오갔다고 주장했다.

1차 시도에서 퇴짜를 맞자 이번에는 곽 씨의 친구인 김모(53) 씨가 다음 날인 13일 오후 8시경 이회창 후보 캠프의 법률지원단장인 김정술 변호사를 찾아갔다.

김 씨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김 변호사의 사무실 근처 커피숍에서 김 변호사를 만나 곽 씨처럼 이 후보의 특강 녹음 내용을 들려줬다.

김 씨는 김 변호사에게 “30억 원에 동영상을 사지 않겠느냐”고 거래를 제안했다.

김 변호사는 “자료의 신빙성을 확신할 수 없고, 설령 맞다고 하더라도 돈으로 자료를 살 경우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거절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측은 김 변호사가 이들에게 “석 달 동안 나눠 할부로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주장했다.


촬영 : 김동주 기자

이에 앞서 공갈미수범들은 8일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도 찾아가 동영상을 미끼로 금품을 요구한 것으로 경찰 조사 결과 드러났다.

○ 공갈미수범 검거

대통합민주신당과 이회창 후보 측을 차례로 접촉한 김 씨 등은 14일 한나라당의 박 특보를 찾아가 “BBK 관련 동영상이 있다”며 금품을 요구했다.

이날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한 호텔에서 박 특보를 만난 김 씨는 “오늘 얘기가 안 되면 (동영상 자료가) 내 손을 떠나 정봉주 의원에게 넘어간다”고 말하며 100억 원을 요구했다. 김 씨는 박 특보를 성산대교 주변으로 데려가 동영상의 일부를 보여 주기도 했다.

15일 오후 김 씨는 박 특보에게 전화를 걸어 요구 금액을 100억 원에서 30억 원으로 낮췄다.

이날 오후 7시경 박 특보는 서울 마포구 S호텔 1215호에서 김 씨를 다시 만나 동영상 원본을 갖고 있던 광운대 최고경영자과정 서버 관리업체인 K미디어 대표 여모(42) 씨를 기다렸다.

여 씨가 노트북을 들고 호텔방에 나타나자 박 특보 측은 이들을 경찰에 신고했고, 오후 7시 50분경 호텔방을 나서던 김 씨 등은 모두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현장에서 동영상이 담긴 CD 2장을 증거물로 확보했다.

경찰은 김 씨와 박 특보를 연결해 준 인사가 과거 야당 총재 등을 지낸 거물 정치인의 지인인 것으로 나타남에 따라 이 인사와 김 씨의 관계를 캐고 있다.

○ 동영상 원본 확보

서울 마포경찰서 홍익지구대로 압송된 김 씨 등은 김정술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김 변호사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해 대통합민주신당의 이강래 선거대책본부장에게 “함께 대처하자”며 전화를 걸었다.

이 본부장의 연락을 받은 대통합민주신당의 박영선 우윤근 정성호 정청래 의원 등이 이날 오후 9시 반경 홍익지구대에 도착했다.

여 씨는 대통합민주신당의 의원들에게 “동영상 CD에 이명박 후보가 ‘BBK를 설립했다’는 발언이 있다”며 “경찰에 제출한 CD 외에 원본 CD가 따로 있다”고 밝혔다.

대통합민주신당 당직자는 16일 오전 1시 반경 서울 강서구청 근처에서 여 씨의 회사 직원을 만나 원본 CD를 건네받았다.

김 씨와 여 씨 등은 김정술 변호사와 대통합민주신당 정성호·임내현 의원, BBK 주가조작 사건으로 검찰에 구속된 김경준(41) 씨의 변호를 맡고 있는 홍선식 변호사 등 4명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정 의원은 “피의자들이 경찰에서 ‘한나라당 관계자에게서 호텔 방 안에서 당신 같은 사람 없애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느냐 등의 말을 듣고 살해 위협을 느꼈다’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박영선 의원은 “여 씨가 (동영상 자료) 몇 컷을 미국 뉴스 전문 채널인 CNN에도 보냈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여 씨는 자신의 변호인들에게 “우리 회사의 퇴직 직원이 전화를 걸어와 이명박 후보의 강의 동영상을 찾아보라고 했다”며 “검찰의 BBK 주가조작 수사 발표(5일) 이전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동영상을 본 뒤 돈이 될 것 같아 범행에 나섰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16일 오전 9시경부터 여 씨 등 피의자들을 상대로 동영상을 만든 과정, 공갈 동기, 배후 유무 등을 조사하고 있다”며 “아직까지는 세 사람이 언제부터 이를 모의했는지 정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촬영 : 김동주 기자


촬영 : 김동주 기자


촬영 : 이종승 기자

▼영상물 제작 공갈미수범, 사채 빚 쪼들려

3명 모두 中企운영… 1명은 “옮길 돈 많다” 얘기듣고 가담▼

동영상을 이용해 한나라당을 상대로 공갈을 친 여모(42) 씨는 최근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 씨는 교육 관련 영상물을 만들어 대학, 기업 등에 납품하는 K미디어를 운영해 왔으며 2000년부터 3년간 광운대의 강의 동영상 제작을 맡았다. K미디어의 자본금은 15억 원.

그러나 여 씨는 1억8000만 원의 사채를 빌려 이자로만 매달 540만 원을 지출하고 있다. 별도로 6000만 원의 은행 채무와 2500만 원의 개인 빚도 지고 있다.

여 씨는 회사 설립 초기에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사무실을 얻었으나 이후 송파구 잠실동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또 올해 10월 중순에는 서울 강서구 등촌동의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200만 원짜리 사무실로 이전해 경영 사정이 갈수록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여 씨와 함께 범행에 가담한 김모(54) 씨는 경남 창원시에서 비료와 사료를 만드는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여 씨와 김 씨는 사업을 하다가 만나 알고 지내는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들과 함께 붙잡힌 곽모(54) 씨는 ‘옮겨야 할 돈이 많다’는 말을 듣고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곽 씨는 김 씨의 친구로 경기 고양시에서 소방기기 관련 업체인 N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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