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의 쌀 지원 요구로 회담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데다 차기 회담 일정을 잡지 못했는데도 이 장관은 1일 오후 열린 종결회의에서 공동보도문 낭독에 앞서 권 참사에게 “3박 4일 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마감 종결회의를 하게 돼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종결회의도, 공동보도문도 발표하지 못했을 경우 자신이 곤란한 지경에 빠질 수도 있었는데 권 참사가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가지 않은 데 대한 ‘사례 표시’처럼 들렸다.
이 장관은 이에 앞서 지난달 31일 ‘공동석식’ 자리에서 “과거에는 환송만찬을 크게 하다가 이번에는 간소하게 실무적으로 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 장관은 또 “어제는 참관지에서 산책도 하고 그랬는데 오늘은 그런 시간이 없어 미안하다”고도 했다.
2월 말 평양에서 열렸던 제20차 장관급회담 당시에는 이 장관이 이처럼 저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이 장관이 권 참사에게 저자세로 사과를 남발한 것은 자신이 약속한 쌀 지원을 이행하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의 표시로 보인다는 게 회담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2월 장관급회담 때 북측은 쌀과 비료 지원에 관한 문구를 공동보도문에 포함시키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장관은 북핵 문제가 진전되지 않은 상황에서 쌀 지원을 약속할 경우 비난 여론이 일 것을 우려해 “나를 믿으라”며 구두로 지원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대북 쌀 지원은 북한의 2·13합의 이행 지연에 따라 늦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담 기간 중 ‘빚 독촉’을 하듯 쌀 차관 제공을 요구한 권 참사에게 이 장관이 저자세를 보임에 따라 북측의 콧대만 높여 준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 장관은 회담이 끝난 뒤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 앞에서 승용차에 탄 권 참사를 배웅하면서 사진기자들을 위해 차창을 내려 달라고 손짓했으나 권 참사는 이를 외면한 채 그대로 떠났다.
이 장관은 이날 “이번 회담이 결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개회부터 종료까지 모든 일정이 소화됐으며 공동보도문을 채택함으로써 회담의 과정과 내용이 잘 마감됐다”고 주장했다.
하태원 기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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