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訪北 6월로 연기, 北은 대답없고… 여론은 나빠지고…

  • 입력 2006년 2월 2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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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 방북 추진을 연기한 것은 DJ 쪽 사정보다는 북한 쪽 사정 때문일 것이다.” DJ가 4월로 추진했던 북한 방문을 6월로 연기한 데 대해 북한 전문가들은 이렇게 입을 모았다. DJ 측이 “(지방선거에 미칠 영향 등) 정치적 오해를 피하기 위해”라고 연기 이유를 밝힌 것과 달리 방북 의사를 표명한 지 한 달이 되도록 북측이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과 관계가 깊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지방선거 악용의 소지가 있다며 정치쟁점화하고 있는 상황도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또 국민 다수가 4월 말 방북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이는 상황에서 방북을 강행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위폐 문제 해결이 먼저”=다수의 북한 전문가는 미국이 북한의 ‘아킬레스건’인 위조지폐 문제를 쥐고 북한을 흔드는 상황에서 DJ의 요청에 답변할 경황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 북한 소식통은 “북한은 먼저 위폐 문제 정리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DJ를 만나 남북관계의 진전을 논하는 것은 차후에 생각할 일”이라고 분석했다.

또 DJ가 경의선 철도를 통한 방북을 추진한 것도 문제가 됐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열차 운행을 위한 군사당국 간의 보장 조치를 마련하려면 북한 군부를 설득해야 하는데 아직 이 문제가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 2004년 10월에 시범 운행에는 합의하고도 아직까지 개통식을 못한 것은 강경 성향을 보이는 군부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얘기다.

통일연구원 전현준(全賢俊) 선임연구원은 “북측으로서는 이렇다 할 선물 꾸러미도 없이 방북하는 DJ를 위해 경의선을 열어 달라고 군부를 설득할 자신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동국대 고유환(高有煥) 교수는 “북한은 경의선 철도 연결을 정상회담용 카드로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 DJ가 2번이나 평양을 방문하면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이미 약속한 서울 답방에 대한 부담이 더욱 커지게 된다는 점도 변수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DJ의 방북이 방중(訪中) 이후 구상을 다듬고 있는 김 위원장의 ‘선택과 집중’ 대상에 끼어들 틈이 없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중국의 북한 소식통들은 “김 위원장은 1월 중국 방문 이후 중국과의 관계를 활성화할 모종의 획기적인 조치를 준비하고 있어 다른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 같다”고 전했다.

▽‘6년 전에는 5억 달러 줬는데…’=DJ 측의 지속적인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면에는 북측의 냉정한 득실 평가가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북측으로서는 철저히 ‘개인 자격의 방북’임을 강조하는 DJ 측이나 현 정부의 태도로 볼 때 대규모 경제 지원에 준하는 푸짐한 선물 보따리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6년 전인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5억 달러의 ‘사례금’을 받았던 것과도 대비된다는 것.

고려대 북한학과 남성욱(南成旭) 교수는 “DJ가 북핵 문제 해결에 있어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역할을 염두에 두고 방북을 추진하지만 북측으로서는 DJ의 중재가 위폐 문제나 북-미 관계 정상화의 실마리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 않다”고 분석했다.

북측 입장에서 보면 DJ 방북 초청은 그야말로 노 정치인에 대한 ‘서비스’ 차원 이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 이 점에서 볼 때 DJ가 정식 초청장도 없이 먼저 가겠다고 발표하는 등 서둘러 방북을 추진한 것은 저자세 외교요, 상황을 오판한 무리수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당국자들조차도 “도대체 이 시점에 DJ가 방북해 뭘 할 수 있겠느냐”며 “연방제 논의 등을 통해 오히려 남남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6월 방북 전망도 순탄치 않아=득이 없는 DJ 방북 카드의 성격이나 핵문제를 남북문제와 연계시켜 온 북측의 태도를 고려할 때 DJ의 6월 방북도 순탄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통일부 당국자는 “역설적이지만 실리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북한의 태도를 고려할 때 DJ의 방북을 성사시킬 열쇠는 북한에 상응한 ‘보상’을 지급할지에 대한 정부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도 DJ를 통해 북한에 ‘반대급부’를 줄 여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DJ 방북 연기에 대해 정부 관계자들이 “DJ의 판단을 존중한다”면서도 내부적으로 “정치적 논란이 불거지던 차에 잘됐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정부 당국자는 “북측의 공식 초청이 없어 어찌 보면 실체가 없었던 DJ 방북에 대해 스스로 연기 결정을 내린 것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김만수(金晩洙) 청와대 대변인은 “정부는 처음부터 DJ의 방북 시기 등과 관련해 어떠한 주문이나 판단도 없었다”고 말했다.

5·31지방선거의 결과도 DJ의 6월 방북 추진에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일정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선거가 끝나자마자 정국이 급속히 개편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어수선한 정국을 앞에 두고 DJ가 혼자서 방북하겠다는 얘기를 꺼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 정국의 유동성이 커지면 어떤 정파도 DJ의 방북을 반기지 않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6월은 현충일과 6·25전쟁, 서해교전 발생일이 겹친 보훈·호국의 달이어서 DJ의 방북 추진이 또 다른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정치권 반응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방북 계획을 6월로 연기한 데 대해 정치권의 반응은 엇갈렸다.

열린우리당 우상호(禹相虎) 대변인은 이날 최고위원회의 브리핑을 통해 “특정 정당의 선거에 도움을 주기 위해 방북을 기획했다는 야당의 공격 때문에 연기된 것은 유감”이라며 한나라당에 화살을 돌렸다. 이어 우 대변인은 “6월 방북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근태(金槿泰) 최고위원도 “한반도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문제가 정략적인 공방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반면 한나라당 이계진(李季振) 대변인은 “국민의 공감대 형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에서 방북 연기를 결정한 것은 현명한 처사”라며 “지방선거 기간 중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을 선거에 이용하는 것을 경계할 것이며 계속 주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방호(李方鎬) 정책위의장은 최고위원회의에서 “6월도 지방선거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기”라며 방북 계획 자체에 이의를 제기했다.

민주당 한화갑(韓和甲)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 여기에 당리당략이 있어선 안 된다”며 적극적인 지원 의사를 밝혔다.

민주노동당도 “한나라당의 지나친 정치적 해석과 정략적 태도로 방북이 연기된 것은 매우 유감”이라는 논평을 냈다.

한편 열린우리당 최성(崔星), 한나라당 고진화(高鎭和), 민주당 김효석(金孝錫), 민노당 권영길(權永吉), 국민중심당 신국환(辛國煥) 등 여야 의원 5명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을 지원하기 위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실천하는 국회의원 모임’(가칭) 결성을 추진하기로 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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