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권 폐지 주장…지휘권 발동…헷갈리는 ‘千의 잣대’

  • 입력 2005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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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굳은 표정으로 답변자료를 보고 있다. 이날 법사위에선 천 장관이 15대 국회의원 시절엔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 수사지휘권을 폐지하자고 주장했다가 막상 장관이 되자 수사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말 바꾸기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김동주  기자
18일 오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굳은 표정으로 답변자료를 보고 있다. 이날 법사위에선 천 장관이 15대 국회의원 시절엔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 수사지휘권을 폐지하자고 주장했다가 막상 장관이 되자 수사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말 바꾸기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김동주 기자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1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해 1996년 15대 국회의원 시절 검찰청법 8조의 수사지휘권 발동을 제한하는 법 개정안을 추진했다가 이번에 지휘권을 발동한 데 대해 “9년 사이에 검찰과 국민이 환골탈태할 변화를 겪었다”고 답변했다.

천 장관은 “입장이 달라졌다는 점을 인정하며, 신념이 바뀌었다고 국민이 생각한다면 그에 대한 비판을 달게 받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천 장관은 현 정부가 출범한 해인 2003년 10월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당시 재독학자 송두율(宋斗律) 씨 사건에 대해 ‘검찰의 독자적 판단에 어떤 간섭도 배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밝혀졌다.

불과 2년 전에 수사에 관여하는 듯한 법무부 장관의 언급조차도 비판했다가 정작 자신이 법무부 장관이 되고 나서는 지휘권 발동을 정당화한 셈. 이 때문에 천 장관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중 잣대를 적용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강정구 교수의 불구속 수사가 국가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
아니다
잘 모르겠다


▶ 난 이렇게 본다(의견쓰기)
▶ “이미 투표하셨습니다” 문구 안내

천 장관은 2003년 당시 국회의원 자격으로 송 씨 사건에 대해 “유사한 사건들과의 형평성이나 국민의 법 감정, 나아가서는 국익 등의 문제도 검찰이 스스로 판단해서 처리해야 될 준(準)사법적 영역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18일에는 “검찰도 국민이 선출한 권력으로부터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법사위 답변에서는 “국민의 걱정을 알고 있다. 그 여론도 일종의 압력이다”라며 ‘국민 여론의 압력’이라는 외풍(外風)을 막기 위해 검찰 수사에 관여했다는 논리를 폈지만 2년 전에는 ‘국민의 법 감정 문제도 검찰이 판단할 몫’이라고 다른 얘기를 한 셈이다.

한편 이날 법사위에서는 천 장관의 태도 변화를 놓고 5시간 동안 뜨거운 공방이 벌어졌다. 천 장관은 자신을 비판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당시에는 검찰이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후 시대가 바뀌었다”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 “당시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고 한 검찰에 대한 분노와 장관으로서 불구속 수사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이날 법사위에서는 천 장관의 답변에 대해 한나라당 주호영(朱豪英) 의원은 “장관이 과거 검찰은 잘못했고 지금 검찰은 옳다는 커다란 착각에 빠져 있다”고 질타했다. 같은 당의 장윤석(張倫碩) 의원도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냐”고 가세했다.

반면 열린우리당 최재천(崔載千) 의원은 “공안사범에 대한 구속이 도리어 정치적인 사건이지 인권을 위한 불구속이 어째서 정치적이냐”며 천 장관을 감쌌다. 같은 당 이원영(李源榮) 의원도 “불구속 수사의 원칙을 지킨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김정훈 기자 jnghn@donga.com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 ‘말바꾸기’ 법조계 반응

“소신을 손바닥 뒤집듯하나”

천정배 법무부 장관과 여권의 일부 핵심 관계자들이 1996년부터 ‘구체적 사건에 대한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 지휘권’ 폐지를 요구했던 사실이 알려지자 법조계에서는 “모순된 언행”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서울변호사회 관계자는 “2001년 당시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폐지가 검찰청법 개정안의 핵심이었다”며 “천 장관이 당시에는 검찰의 독립과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수사지휘권 폐지를 주장했으면서 지금 와서 그것을 민주적 통제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고 말했다.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 이헌(李憲) 총무간사는 “시대가 바뀌어도 검찰의 중립성이 지켜져야 하는 것은 만고의 진리”라며 “상황에 따라 변하는 천 장관의 모순된 주장에 당혹감과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검사들 사이에서도 비판적인 의견이 많았다. 지방의 한 평검사는 “아무리 정치인 출신이라고 하지만 처지가 바뀌었다고 해서 소신을 손바닥 뒤집듯 해도 되는 것이냐”고 말했다.

지방의 한 중견 검사는 “겉으로는 검사들이 침묵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지만 속으로는 많이 격분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검찰총장 후속인사 등의 문제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 내려진다면 집단사표 사태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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