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정부 도청 증거 드러났다]R-2 한대로 64회선 감청…

  • 입력 2005년 9월 26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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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의 ‘불법 감청(도청)’의 진상이 국정원 직원들의 ‘자백’과 검찰 수사로 거의 확인되고 있다. 국정원이 8월 5일 도청 사실을 처음으로 고백한 지 50일 만이다. 국정원 직원이 자백한 핵심 내용은 유선중계통신망 감청 장비인 ‘R-2’를 이용해 도청을 했다는 것과 2002년 대통령선거 전 정형근(鄭亨根) 한나라당 의원 등이 폭로한 문건이 국정원에서 작성됐다는 것. 이에 따라 국정원의 도청 부분에 대한 검찰 수사는 전직 국정원장들에 대한 조사를 거쳐 곧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기자들 통화 내용까지 상세히 기록”=검찰은 9월 초부터 국정원 실무 직원들에 대한 소환 조사를 본격화했다.

이들 직원은 처음에 도청을 부인했으나 추석 연휴 직후인 20일 2, 3명의 직원이 태도를 바꿔 시인하기 시작했다. 서울중앙지검 황교안(黃敎安) 2차장도 이날 “R-2를 이용한 도청은 구체적인 증거나 자료가 없었으나 그간 수사에서 어느 정도 소득이 있었다”면서 “구체적인 도청 사례를 일부 확보했다”고 말했다.

▶본보 21일자 A10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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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1∼24일 국정원 직원 20여 명이 검찰에 출석해 도청 사실을 집중적으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 직원들은 특히 정 의원 등이 2002년 대선 전 폭로한 문건에 대해 자신들이 직접 작성했다는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간부급 직원은 검찰에서 처음에 “그런 사실이 없다”고 완강히 부인하다가 최근 실무 직원들의 진술 내용을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직 국장급 간부는 처음에 “기억이 안 난다”고 하다가 “(도청 사실에 대해) 보고받은 사실이 있다”고 진술했다는 것.

이 문건들은 국정원의 도청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일부 내용 중에는 국회의원과 기자들이 휴대전화로 통화한 내용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검찰은 이 같은 진술과 문건이 국정원의 도청 사실을 입증할 물증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1등 공신은 김승규(金昇圭) 국정원장”=국정원 직원들의 자백에는 김 원장의 ‘공로’가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원장은 추석 연휴 전후에 직원들에게 “이참에 진실을 다 털고 가자”며 직원들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법무부 장관을 지낸 사실을 거론하며 ‘진실’을 말하는 직원에 대해서는 검찰에 최대한 선처를 요청할 수 있다고까지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20여 명의 직원이 ‘자술서’를 작성해 제출했고, 이를 계기로 검찰에 출두해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부 검사는 신중론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위계질서가 강한 국정원의 속성상 국정원 직원들이 상부의 ‘지시’나 ‘의도’에 맞춰 과장된 진술을 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찰 관계자는 “국정원 직원들이 기소된 뒤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청은 주로 R-2로=국정원의 이 같은 도청은 R-2를 이용해 이뤄진 것이라고 국정원 직원들이 진술했다. R-2는 국정원이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디지털 휴대전화를 감청하기 위해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 장비 구매를 발주했으며, 이종찬(李鍾贊) 전 국정원장 때인 1998년 5월 처음 도입해 천용택(千容宅) 전 국정원장 재임 기간에 주로 운용된 장비다.

이 장비는 휴대전화 사용자의 통화 내용이 한 기지국에서 다른 기지국으로 중계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칠 수밖에 없는 유선 구간이 있다는 점에 착안해 만들어졌다.

국정원은 이 장비를 네덜란드 등에서 구입했으며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 모 연구소에서 기능을 보완하거나 일부 기능을 자체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64회선을 감청할 수 있는 R-2 장비는 한 대에 2억 원가량이며 국정원은 이 장비를 20대가량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직원들은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의 회선을 영장이나 대통령의 승인 등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도청을 하는 데 이용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이들 장비를 휴대전화 전문 감청 장비인 ‘카스(CAS)’와 함께 2002년 3월 모두 폐기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국정원 도청 의혹 폭로 뒤 전개 과정
구 분내 용
2002년 대선 전
한나라당
도청 문건 폭로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 2002년 9월 24일 국정감사에서 “국정원 도청 자료”라며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 로비 의혹 제기
-한나라당 김영일 당시 사무총장, 2002년 11월 28일 “국정원이 여야 정치인, 언론사 사장, 국회 출입기자, 기업인 등을 무차별 도청했다”며 통화 내용 24건 공개
국정원 해명 및 반박-2002년 9월 25일, “정 의원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해명
-2002년 11월 29일, “도청한 사실이 없으며 무책임한 폭로에 대해 법적 대응 검토 중”이라고 반박
2002년 말 검찰의
수사 착수와
올해 4월 수사결과 발표
-참여연대가 신건 당시 국정원장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발
-국정원은 김영일 당시 사무총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
-서울지검 공안2부가 총 6건의 고소 고발 사건 수사 착수
-올해 4월 서울중앙지검, “휴대전화 도청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무혐의 종결
2005년 검찰의
도청 수사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
-김대중 정부 시절 휴대전화 불법 감청 사실 첫 확인
-한나라당이 폭로한 국정원 도청 의혹이 일부 사실임을 검찰이 확인
-김승규 국정원장, 형사처벌시 선처를 약속하며 직원들에게 진실 고백 지시
-국정원 직원과 일부 간부, 검찰에서 시인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 2002 ‘도청 폭로문건’ 내용

2002년 9월 24일.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국가정보원 고위 간부에게서 받은 도청자료라며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 로비의혹을 담은 문건을 내놓았다.

자료에는 ‘한화가 민주당 L 의원 등을 동원해 대한생명 인수 작업을 벌이기로 했으며 김승연(金升淵) 회장이 실무자들에게 민주당 한화갑(韓和甲) 대표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후보에게 협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는 내용 등이 들어 있었다.

정 의원은 국정원의 도청이 5월 5일과 9월 4일 이뤄진 것이라며 구체적인 통화 날짜까지 제시한 뒤 “(거짓이면) 의원직을 걸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국정원은 즉각 “도청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지만 이 폭로를 신호탄으로 국정원 도청 의혹은 대선 정국을 뜨겁게 달군 핫이슈로 부상했다.

정 의원은 2, 3탄을 계속 터뜨렸다. 10월 4일에는 “현대의 대북사업은 박지원(朴智元) 대통령비서실장이 총괄한 사업”이라며 박 실장과 일본인 요시다 다케시 씨와의 대화내용을, 10월 22일에는 ‘4000억 원 대북지원설’과 관련해 당시 이근영(李瑾榮) 금융감독위원장이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에게 전화를 걸어 축소수사를 요청했다는 내용을 잇달아 내놓았다.

도청 공방은 노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후보의 단일화 직후인 11월 말 극에 이르렀다.

한나라당 김영일(金榮馹) 사무총장은 11월 28일 정 의원이 입수한 것이라며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 언론사 사장 및 정치부 기자 등 30여 명에 대한 도청 명세를 공개했다. 이 자료에는 동아일보 김학준(金學俊) 사장과 민병준(閔丙晙) 한국광고주협회장, 또 본보 기자와 김만제(金滿堤) 당시 한나라당 의원과의 통화 내용도 들어 있었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까지 나서 공세를 퍼부었다.

이에 청와대와 국정원은 “신빙성 없는 이야기들을 짜깁기한 증권가 정보지 수준”(박 실장) “문건 양식이 다르다. 완전히 조작된 괴문서”(신건·辛建 당시 국정원장)라고 정면 반박해 도청 공방은 투표일 직전까지 계속됐다.

결국 정 의원 등의 도청 폭로는 실체적 진실이 가려지지 않은 채 ‘선거용 공방’으로 유야무야됐다. 한나라당이 국정원의 ‘국내 도청팀’ 실체나 구체적인 도청 경위 등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여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2003년 3월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한나라당이 폭로한 내용의 일부는 국정원이 국제전화 통화를 감청한 자료가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는 국정원이 내국인 전화를 도청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지만 정 의원의 폭로가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는 점을 비공식적으로나마 처음 인정한 것이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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