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도청 테이프 압수]‘판도라의 상자’ 닫힌 채 있었나

  • 입력 2005년 7월 30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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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되는 박인회씨불법 도청 테이프를 이용해 삼성그룹에 금품을 요구한 재미교포 박인회 씨(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29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및 공갈 미수 혐의로 구속수감되고 있다. 박영대 기자
수감되는 박인회씨
불법 도청 테이프를 이용해 삼성그룹에 금품을 요구한 재미교포 박인회 씨(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29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및 공갈 미수 혐의로 구속수감되고 있다. 박영대 기자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미림팀장을 지낸 공운영(58) 씨의 집과 사무실에서 발견된 불법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은 ‘판도라의 상자’나 마찬가지다. 검찰은 29일 테이프와 녹취록의 내용, 보관 경위, 유출 여부 등을 파헤치겠다고 밝혔다. 수사 결과가 가져올 파장은 현재로선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다.》

▽핵폭탄급 내용이 담겼나=우선 테이프와 녹취록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이며, 이들이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공 씨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안기부에서 미림팀을 이끌면서 정계 재계 관계 언론계 등 각계 인사의 대화를 불법으로 녹음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는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와 총선, 금융실명제 실시, 한보그룹 부도, 외환위기 등 국가적으로 큰 일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런 사안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사의 대화를 집중적으로 도청했을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정책 결정 및 인사의 과정, 정파 간의 물밑 접촉과 암투, 기업의 로비 행태, 유명 인사의 사생활 등이 고스란히 담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인지 벌써부터 시중에는 모 대기업 간부와 유명 정치인의 녹취록이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공 씨는 “우리 사회는 전 분야에 걸쳐 입에 담지 못할 정도의 아첨, 중상모략, 질투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돈의 연속”이라고 자술서를 통해 말한 적이 있다. ‘음지(陰地)’에서 바라본 우리 사회의 단면이 어땠으며, 그 파장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하게 한다.

1999년 두 박스 분량의 테이프(200여 개)와 녹취록을 공 씨로부터 반납 받았다가 소각한 이건모(60) 당시 국정원 감찰실장의 반응은 더 적나라하다.

그는 “박스 개봉 순간 소름이 끼쳐 ‘이런 내용이 이렇게 많을 줄 알았으면 회수하는 척만 하고 말걸’이라는 후회 등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도청 자료가 공개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대혼란을 야기하고 모든 분야에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고 표현할 정도이니 테이프 공개 시 파장이 엄청날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테이프는 없나=공 씨에게서 압수한 테이프가 국정원에 반납한 테이프의 복사본인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것인지는 검찰이 밝히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것 외에 또 다른 테이프가 존재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공 씨는 “1993년 잠시 중단됐던 미림팀이 이듬해 재건됐을 때부터 훗날을 위해 테이프를 밀반출해 왔다”고 말했다.

전체 테이프 중 앞으로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인사나 공개됐을 경우 파장이 클 내용만 선별적으로 밀반출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공 씨가 국정원에 반납한 자료는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에게 유리한 내용을 담은 테이프이며 김 전 대통령에게 불리한 내용은 따로 숨겨두었는데 이번에 검찰에 압수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나온다.

이런 맥락에서 이 전 실장이 테이프 반납 당시 천용택(千容宅) 전 국정원장에게 “당장은 활용도가 크겠지만 자칫 국가에 큰 화를 끼칠 수 있다”고 건의한 부분이 주목된다.

공 씨는 압수수색 같은 상황에 대비해 ‘제3의 장소’에 다른 자료를 보관했을지 모른다. 정보기관에 30년 가까이 근무한 공 씨가 불법 도청 자료를 모두 집이나 사무실에만 보관했을 것이라고 믿는 전·현직 국정원 직원은 많지 않다.

또 통상 4명으로 운영된 미림팀에서 팀장인 공 씨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의 팀원이 수시로 교체됐기 때문에 이들이 개인적으로 테이프를 밀반출했을 수도 있다.

검찰이 이번에 압수한 테이프와 녹취록을 확인하겠다고 밝힌 만큼 그 내용이 정리-취합-보고 되는 과정에서 민감한 내용이 다시 유출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누가, 어떤 자료를, 어떤 형태로 보관 중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안기부 X파일’의 파괴력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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