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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3월 17일 19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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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야(巨野)’ 구도를 바꾸려는 대응은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의 경우 3당 합당으로,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총선 올인’으로 나타났다.
거야에 대한 공포는 우리가 대통령제의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이라고 다를 바 없는 듯하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6년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대패하자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집권 이후 백악관과 의회를 함께 장악했던 민주당 지도부는 몹시 당황했던 모양이다.
민주당 상원지도부의 핵심이었던 윌리엄 풀브라이트 의원은 선거 다음 날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에게 공화당 멤버를 국무장관에 임명하고 사임토록 공개 요구했다. 부통령이 공석 중이었던 만큼 대통령 승계 서열에 따라 공화당 국무장관이 대통령에 취임할 수 있도록 하자는 제안이었다. 이 소동은 결국 아이디어 차원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거야가 장악한 의회 권력에 대한 공포가 미국에서조차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취임 초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의욕을 보였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작년 말 재신임카드를 꺼내 든 이후 총선 올인 전략으로 돌아섰다. 국회의원의 ‘수적 우위’를 확보하지 않고선 원활한 국정운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의회 장악이 훌륭한 대통령직 수행의 전제조건이 아님은 YS와 DJ의 예에서도 여실하다. 1996년 총선에서 대승한 YS나 2000년 총선에서 성과를 거둔 뒤 DJP 2차 연합으로 과반 의석을 확보한 DJ는 이후 오히려 ‘오기(傲氣)’의 정치로 임기 말 자식까지 구속되는 몰락을 겪었다.
거꾸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처럼 민주당이 장악한 여소야대의 상황 속에서 성공한 공화당 출신 미국 대통령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바로 ‘양당 공조의 정치’를 이뤄낸 사람들이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측은 ‘다수의 횡포’를 비난하지만 탄핵까지 몰고 온 야당과의 충돌은 노 대통령이 자초한 측면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의원은 “포퓰리즘적인 선동 행태와 검찰 수사를 통한 압박 때문에 한나라당 의원의 상당수가 총선에서 절멸(絶滅)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었던 게 탄핵 추진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고 털어놓았다.
아무튼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 정국에 대해 최근 만난 한 서방 외교관은 “결국 대통령제 아래서는 대통령과 의회 권력의 충돌을 어떻게 조정하고 극복하느냐가 과제”라며 “이번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위한 성장통(成長痛)”이라고 촌평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전개 과정을 지켜보면서 계속 화농해 곪아터지는 악순환의 환부(患部)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금할 수 없었다.
‘제도와 법치’에 입각한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하고 은원(恩怨)의 갈등구조를 확대 재생산할 경우 사회·정치적 갈등으로 정치불안이 상시화돼 있는 남미식 대통령제로 가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동관 정치부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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