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국정 볼모로 한 ‘재신임’ 승부수인가

  • 입력 2003년 10월 10일 18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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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측근인 최도술씨의 SK 비자금 수수 의혹을 포함해 그동안 축적된 국민의 불신에 대해 재신임을 묻겠다고 한 것은 충격적이다. 경위야 어떻든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집권 7개월여 만에 재신임을 물어야 하는 상황까지 온 것은 국가적으로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노 대통령은 재신임 시기와 방법을 공론을 통해 결정하겠다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예상되는 정쟁(政爭)과 혼란이 국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국민은 불안하고 두렵기만 하다. 당장 대외 신인도가 걱정이다. 정정(政情)이 불안해지면 외국인 투자부터 빠져 나간다. 이라크 파병 문제를 비롯한 시급한 국정 현안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국민은 경제난과 온갖 사회적 갈등에 지칠 대로 지쳐 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했지만 그것이 국정의 안정과도 맞바꿀 만큼 큰 것인지는 의문이다. 측근이 비리를 저질렀으면 죗값을 받게 하고 대통령 자신도 국민에게 사과하면 될 일이다. 수사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결과가 어떻든 국민은 나를 불신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재신임이란 극단의 처방을 들고 나온 것은 어떤 이유로도 이해하기 어렵다. 최씨 비리 이상의 뭔가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정 과정도 석연치 않다. 대통령이 발리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ASEAN)+한국 중국 일본’ 정상회의에서 돌아온 것은 9일 저녁이었고 재신임을 꺼낸 것은 다음날 오전이었다. 발리에서부터 최씨 문제로 고민했다지만 하룻밤 사이에, 그것도 청와대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런 결정을 했다고 한다. 만에 하나 대통령이 어떤 ‘충동’에 못 이겨 이처럼 엄청난 결정을 내렸다면 이는 더욱 무책임한 일이다. 옛말에 윤언여한(綸言如汗)이라고 했다. 국정 최고책임자의 말은 땀과 같아서 한번 나오면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다.

노 대통령이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만일 일각의 주장대로 ‘위기감을 불러일으켜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고 이를 통해 위기국면을 정면 돌파하기 위한 것’이라면 용납되기 어렵다. 어느 나라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국민과 국정을 볼모로 잡는다는 말인가.

대통령이 발의한 ‘재신임 정국’이 어떤 방향으로 매듭지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야당 일각에서는 벌써 구체적인 재신임 절차까지 거론되고 있으나 발언 자체를 철회해야 한다는 소리도 역시 나오고 있다. 어떤 쪽으로 결론이 나든 이런 논란이 국정안정에 미칠 부정적 영향이 크다는 점이 우려된다. 대통령보다 나라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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