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총리 질타'하는 비서실장 있는 한

  • 입력 2003년 6월 5일 18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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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국무총리를 많이 질타했다고 하는 문희상 대통령비서실장의 발언은 허울뿐인 책임총리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을 포괄적으로 보좌하고 행정각부를 통할하는 헌법기관인 총리의 형식적 권력서열은 행정부의 제2인자이지만 실질적 권력서열은 대통령비서실장보다도 아래임이 확인된 것이다. 청와대 내에는 또 비서실장보다 센 ‘왕수석’이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으니 총리의 정부 내 위상은 더욱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총리로서 당연히 해야 할 부처간 정책조정까지 대통령도 아닌 대통령비서실장의 지시를 받아 나설 정도라면 의전총리라는 말도 과분하다. 차라리 ‘로봇총리’라는 말이 어울릴 듯싶다. 역대 정부에서도 총리가 제대로 대접받은 적이 드물지만 현 정부에서는 홀대 수준을 넘어 아예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를 입 밖에 낸 문 실장의 의식상태는 간단히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무례하기도 하지만 책임회피 의도도 엿보인다. 사실 중요한 정책조정은 뒷전에서 청와대가 다 하면서 총리더러 앞에 나서라는 것은 문제가 생기면 책임만 지는 방탄총리가 돼 달라는 뜻일 수 있기 때문이다.

총리가 그 지경이라면 청와대에 튼튼한 줄이 없는 장관들의 국정소외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언론이 한목소리로 비판하는데도 굳이 행정경험이 없는 정치권인사들을 각 부처에 정책보좌관으로 심으려는 것도 청와대가 각 부처를 직접 장악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총리를 질타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대통령비서실장이 있는 한 내각에 총리의 영이 설 리 없다. 장관이나 공무원이나 모두 총리는 외면하고 청와대만 바라볼 텐데 총리의 ‘책임행정’이 가능할 리도 없다. 그러니 시어머니 역할을 충실히 해 장관들의 기강을 확실히 잡고 필요하면 헌법에 보장된 장관해임건의권을 적극 행사하겠다는 고 총리의 다짐이 공허하게 들린다. 노무현 대통령은 문 실장을 엄히 질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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