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정부 노동정책-공공개혁]지나친 勞편들기

  • 입력 2003년 4월 22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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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정부가 두산중공업과 철도 파업이라는 두 개의 큰 고비를 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노사간 ‘힘의 균형’을 내세운 정부가 지나친 노조 편향성을 보임으로써 앞으로의 노사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수년간 추진해 온 공공부문 개혁도 정부의 친 노동정책에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대응으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다. 현 정부의 공공개혁과 노동정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긴급 점검해 본다.》

철도노사의 단체교섭이 20일 가까스로 타결돼 파업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정부가 3월 두산중공업 파업사태에 이어 이번 철도 분규에서도 지나치게 노조 편향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일각에서는 “불법파업에 대해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손해배상 청구 및 가압류, 그 전에는 주동자 구속으로 대응했지만 현 정부는 마땅한 대처수단이 없다”며 노조의 ‘일방통행’을 걱정하고 있다.

▽두산중공업과 철도분규의 사례=두산중공업 노사 갈등은 노동계와 경영계의 대리전 양상을 띠면서 새 정부의 노동정책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결과는 노조의 압승. 노조는 권기홍(權奇洪) 노동부 장관의 중재에 힘입어 △조합원 개인에 대한 가압류 및 손해배상 소송 철회 △해고자 5명 복직 △지난해 파업 때 무단결근 처리로 인한 임금 손실분의 50% 보전 등의 성과를 얻어냈다.

철도노사의 단체협상 역시 사측은 철도시설 및 운영부문 분리방안을 관철하는 대신 인력충원, 해고자 복직 등 노조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김장호(金章鎬·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 한국노동경제학회 회장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억눌려왔던 노조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참여정부의 노동정책과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했다.

▽노조에 편향적?=새 정부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노동정책의 화두(話頭)로 내세우며 △손해배상 가압류 남용 제한 △‘정당한 쟁의행위’ 범위 확대 △단체행동권이 크게 제약받는 철도 발전 등 필수 공익사업 범위 조정(축소) 등을 실천과제로 제시했다.

이는 당장 사용자 단체의 대표격인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경총의 김영배(金榮培) 전무는 최근 한국노동연구원 주최로 열린 노사정 포럼에서 “파업 만능주의가 만연한 노사관계의 현실을 감안할 때 정부의 노동정책은 파업을 더욱 조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비판했다.

아주대 송위섭(宋瑋燮·노동경제학) 교수도 “노조의 파업에 맞설 수 있는 손배 및 가압류, 해고 등 사용자측의 무기를 정부가 거둬 가면 노사관계의 저울추가 노조쪽으로 치우쳐 결국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산적한 노동현안 어떻게=정부는 두산중공업과 철도사태의 원만한 해결로 노정(勞政)관계가 화해와 협력 무드로 바뀌어 주5일 근무제, 비정규직 처우개선, 기업연금(퇴직연금) 등 굵직한 현안을 무난히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언제까지 노조의 손만 들어줄 수는 없는 게 현실. 정부의 노동정책 조언자인 김장호 회장은 “정부는 비정규직 및 영세 중소기업 노동자는 적극 보호하겠지만 공기업과 대기업 노조 등 힘센 노조의 과도한 요구에는 단호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언제라도 노정관계가 악화되면 노동계와 정부가 대립하면서 노동 현안의 해결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철도 협상이 남긴 것▼

철도노사 협상이 노조의 ‘판정승’으로 끝나면서 공공부문 개혁에 ‘빨간 불’이 켜졌다.

새 정부의 노사정책이 노동계에 꽤 기울어진 것으로 드러나는 등 공공개혁의 후퇴 조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 파업에 따른 책임을 가리지 못하고 해고자의 복직 기준을 상실하는 등 나쁜 선례도 남겼다.

올해는 △투자 심리 회복 △경제 구조조정 △누적된 노사 현안 해결 등이 맞물려 정부의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위기의 공공개혁〓철도노사 협상은 정부의 대폭 양보로 타결됐다.

노조에 밀려 민영화 방침을 철회했고 노조에 대한 가압류나 손해배상청구도 취하했다. 해고자 45명을 복직시키고 6월 말까지 1500명의 인력을 늘리는 등 노조의 요구가 대부분 수용됐다. 정부는 당초 불법 파업에 강경 대응하겠다고 밝혔으나 실제 나타난 결과는 달랐다.

이런 조짐은 이미 두산중공업 사태에서 나타났다. 올 3월 노동부는 두산중공업 파업에 개입해 노조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중재안을 관철시켰다.

정부가 이번 철도노사 협상에서 보여준 태도는 지난해 2월 발전노조 파업 때와는 차이점을 보였다. 당시 38일간의 파업에도 불구하고 민영화 방침은 흔들리지 않았고 노조는 스스로 파업을 철회했다.

▽공공개혁 부담 커져〓이번 철도 노사협상 결과는 사실상 노조 주장을 상당 부분 수용함으로써 지금까지 추진해온 공공개혁의 방향을 돌려놓았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철도 구조개혁과 관련해 정부는 3월에 이미 당장 민영화는 어렵다고 보고 일단 공사로 탈바꿈하겠다고 한발 물러선 바 있다. 노사 협상 이후 정부가 “공사화 의지엔 변함이 없다”고 밝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번 노사협상에서 민영화 포기를 밝히면서도 공사화에 대한 노조의 동의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공공개혁 과제로는 △조흥은행 매각 △발전 분할 △주택공사와 토지공사 통합 △4대 보험의 전산 및 재정 통합 등이 꼽힌다.

이들 공공개혁이 철도노사 협상과 비슷한 양상으로 흐른다면 개혁은 쉽지 않다. ‘노조 편향적 정책’에 따라 사용자측은 물론 노조의 요구 수위도 더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공익성 고려해야〓공공부문 파업은 민간기업보다 상대적으로 노조원들에게 미치는 직접적 피해가 적다. 이는 전체 국민의 이익에 맞지 않는 합의나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조동철 거시경제팀장은 “경쟁에 대한 부담이 없는 공공부문에서 가장 강력한 노조가 형성되는 것은 이미 선진국에서도 확인됐다”고 말했다. 경쟁이 치열한 민간분야에서는 파업이 부담스럽지만 공공분야는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이는 파업 기간에도 나타난다. 발전노조 등 공공부문의 파업은 한 달 이상을 끄는 경우가 적지 않다.

조 팀장은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은 노조와 정부의 입장보다 국민경제를 고려해 진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주요 공공부문(민영화된 공기업 포함) 파업 동향
파업 주체기간쟁점결과 및 의미
한전 발전노조2002년 2월25일∼4월2일(38일간)-민영화 반대
-파업 중 대량해고
-정부 강경대응과 노정합의로 노조가 파업철회
-민영화 방침 재확인
-노조내부 불안과 갈등
두산중공업 노조(옛 한국중공업)2002년 5월22일∼7월7일(47일간)
2003년 1월9일∼3월12일(63일)
-민영화에 따른 노사갈등
-노조원에 대한 손해배상 및 가압류
-해고자복직
-정부 개입으로 노조 요구를 대폭 수용해 파업타결
-손해배상 등 각종 소송 철회, 해고자 일부 복직, 파업기간 중 임금 지급 등
-정부개입으로 노조요구를 수용한 선례 남김
철도노조2003년 4월20일부터 전면파업 추진-민영화 반대
-가압류 및 손해배상
-해고자 복직 및 인력충원
-정부, 노조 요구 대폭 수용해 파업전 타결
(손해배상요구 철회, 해고자 복직, 민영화 방침 후퇴 등)
-민영화 방침 철회로 철도개혁 후퇴 우려

▼재계 "불법행위에 왜 법집행 안하나"▼

노동계에 힘을 실어주는 노무현(盧武鉉) 정부의 노사문제 해결 방식은 투자를 위축시키고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감을 심어준다며 기업인들이 크게 우려하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법을 집행하는 권한은 정부에 있는데 정부는 법을 집행할 생각은 않고 대화로만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며 “대화가 안 되면 법과 원칙을 무시하면서까지 노조의 요구를 수용해 문제를 봉합해버린다”고 비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한 관계자도 “두산중공업 사태의 경우 정부가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하면서 사측을 압박했고 특히 노조가 장기간 파업하면 정부가 사측의 양보를 얻어낼 것이라는 기대심리를 심어주었다”며 “그러나 노조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최근 파업 만능주의가 심화하면서 기업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다”며 “본격적인 임단협 시즌을 맞아 노조측은 조합비 가압류 등 핫이슈를 이번 기회에 모두 다 해결하려고 벼르고 있다”고 덧붙였다.

알리안츠생명 한국지사장 미셸 캉페아뉘는 “한국을 동북아 허브로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필수적인 게 노사 관계의 안정”이라며 “내가 만난 다국적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중 한국의 노사 문제에 대해 어려움을 제기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반면 노동계는 참여정부의 친(親) 노조 성향을 내심 반기면서도 겉으로는 “더 지켜봐야 한다”며 ‘표정관리’를 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물론 철도노조의 상급단체인 민주노총도 20일 철도 분규가 타결된 뒤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2만1000여명의 조합원을 둔 거대 철도노조가 파업 직전까지 갔다가 정상을 되찾은 데 대해 아무런 성명서도 발표하지 않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얻을 만큼 얻었는데 괜히 나서서 정부와 사용자측을 자극할 필요가 있느냐”면서도 “합의문이 제대로 이행될지 주시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더 신중한 모습. 이재웅(李載雄) 사무총장은 “김대중(金大中) 정부도 초기에는 친노조정책을 공언했지만 결국은 재계의 압력에 굴복해 노동탄압으로 돌아섰다”며 “참여정부의 정책방향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철도노조의 백성곤(白成坤) 교육선전실장은 “인력이 없어 살인적인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성과를 거뒀는데 ‘정부가 백기(白旗)를 들었다’는 식의 평가가 나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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