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정부 출범 한달]틀깨기 곳곳서 파장

  • 입력 2003년 3월 24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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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신임 장관들이 1박2일 일정으로 워크숍을 가졌던 8일.

식사시간이 돼 노 대통령과 장관들이 식당에 들어섰을 때 식당 한 쪽에서는 이미 몇몇 젊은 비서관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본 한 장관이 “그 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인데…”라고 혀를 찼으나 노 대통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공식회의 석상은 아니지만 토론을 벌이다가 대통령 앞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는 참모가 있을 만큼 요즘 청와대 안팎에서는 기존 관념과 관행의 틀을 깨는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이런 변화의 진원지는 물론 노 대통령 자신이다. 자주 “청와대 생활이 답답하다”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노 대통령은 최근 전에 살던 명륜동 집에서 가져온 자전거를 타려다가 경호실의 제지를 받고 포기하기도 했다. 아침에 관저에서 집무실까지 혼자 걸어 내려와 경호원들을 긴장시키기도 하고, 인사문제를 다루는 참모들과의 회의에서는 서로 얼굴을 붉히며 갑론을박하는 장면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 같은 변화의 흐름은 청와대와 정부의 운용 시스템에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정부 출범 직후 단행된 장차관급 인사에서는 기존의 서열 파괴가 두드러졌다. 40대의 군수 출신을 행정자치부 장관에, 검찰 근무 경험이 전무한 여성변호사를 법무장관에 기용했다. 기수를 파괴한 검찰 인사를 통해 수뇌부를 전면 교체하는가 하면, 법조계 내의 서열관행을 깨기 위해 판사와 검사의 단일호봉제도 추진하고 있다.

고급 공무원의 충원방식도 큰 변화를 맞고 있다. 연공서열 관행의 기반이던 행정고시 일변도에서 인턴수습제 및 개방형 채용을 확대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변화의 시도는 새 정부의 주축세력이 이른바 ‘비주류’ 출신이기에 가능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노 대통령이 직접 현장에 나서는 일도 잦아질 전망이다. 평검사들과의 TV 생중계 대화에 이어 노 대통령은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장성들은 물론이고 필요하면 영관급 장교들과도 대화하겠다”고 예고했다. 노동부 업무보고 때는 “노사정위원회에 참석해 노사정위에서 결정된 사안은 반드시 지켜진다는 점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현안에 대해서도 자신이 직접 해법을 내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부산 금정산과 양산 천성산 구간의 경부고속철 공사를 재검토하라고 지시한 것이나, 국가정보원 직원의 부처 출입제 폐지를 검토키로 한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다만 이런 태도에 대해서는 자칫 모든 이해집단이 대통령과 직접 담판하려 나설 경우 정부 공조직의 무력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비판론도 나온다.

대야(對野)관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노 대통령은 지난 한 달 동안 여야 3당 지도부를 차례로 초청해 대화를 나눴고, 국회 국방위 소속 여야의원들과도 만났다. 다음달 2일에는 국회에 직접 가서 시정연설을 할 예정이다.

반면 민주당과의 관계는 당정 분리가 이뤄진 탓도 있지만 과거보다는 긴밀하지 못한 상황이다. 노 대통령은 민주당 지도부의 요구에 따라 격주에 한 번씩 정례회동을 갖기로 했지만 여야를 같은 거리에 놓고 정국을 풀어가는 ‘등거리 정치’를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변화에 대해서는 ‘신선하다’는 긍정론과 ‘불안하다’는 부정론이 교차하고 있지만 노 대통령과 새 정부의 ‘틀 깨기’ 행보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문희상실장 자평▼

문희상(文喜相) 대통령비서실장은 24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취임 1개월을 맞아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연착륙에 성공했다”고 자평했다.

문 실장은 “지난 30일은 마치 300일 같았다”고 회고하면서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시대정신의 바람을 탈 수 있었던 것이 연착륙 성공의 요인이며, 국민의 성원과 지지로 모든 게 성공적으로 이뤄졌다”고 국민에게 감사의 뜻을 밝혔다.

그는 또 “지난 30일이 새로 레일을 까는 작업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레일 위에 올라서서 달리는 작업이 될 것이다”면서 “새정부 출범 100일까지는 새 정부가 나아가야 할 지표, 방향, 목적지가 될 항구의 이름을 새기는 작업이 주가 될 것이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기자들과의 일문일답.

―앞으로의 과제는 뭔가.

“일반 참모부서인 비서실의 역할을 이제 정책실에서 맡을 것이다. 100일 안에 새 정부가 무엇을 할 것인지 마스터플랜이 나올 것이다.”

―지난 한 달간 부족하다고 느낀 것은….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이고, 의욕이 클수록 이에 따른 실수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근본적인 판단이 잘못돼서 온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하지만 결코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비서실장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데….

“과거처럼 비서실장의 역할이 커지면 대통령과 나라를 망친다는 우려가 있다. 나부터 잘라내는 아픔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종래는 인사권과 사정권을 비서실장이 직할했는데 지금은 위원회 의장 역할에 그친다. 그런 측면에서 상당부분 손발이 잘렸다.”

-새 정부 인사에 점수를 준다면 얼마를 줄 것인가.

“여론조사 결과 가장 반대가 많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인사가 가장 잘된 인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데에 놀랐다. 국민의 생각을 우리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지 않나 생각도 한다.”

-집권 1년 개혁의 마스터 플랜은….

“앞으로 모든 개혁 방향이 손해가 나고 당대의 평가를 못받고, 인기가 떨어져도 국민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日 요미우리 평가▼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24일자에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취임 한 달에 대해 “외교와 내정 모두 안정감을 잃은 채 스타트를 끊었다”고 평가했다.

외교에서는 북한 핵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의 거리감을 확인했으며, 내정에서는 기존 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다양한 ‘행정실험’을 벌이는 과정에서 행정기구가 무력화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됐다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

요미우리는 젊은층의 개혁 열기와 반미 감정에 힘입어 당선된 노 대통령이 당선 후에는 한미동맹을 중시해 미국의 이라크공격을 지지했지만 이로 인해 반전경향이 강한 젊은 지지자들의 반발에 직면했다고 전했다.

요미우리는 특히 미국의 이라크공격 명분이 대량살상무기의 근절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상황인 대북 정책을 미국측과 어떻게 조정할지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고 지적했다.

최근 미국이 주한미군의 철수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주한미군과 관련해 견해차가 노출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는 것.

이 신문은 노 대통령이 △진보성향의 여성변호사 법무장관 기용 △연차와 서열에 얽매이지 않는 검찰인사 단행 △평검사들과의 공개토론회 개최 등의 실험적 시도로 눈길을 끌었다고 소개했다. 다만 관료조직을 ‘적’으로 삼는 식의 개혁 방법에 대해 걱정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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