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총리후보 紙上검증]<中>위기상황 리더십

  • 입력 2003년 2월 10일 18시 50분


‘나라를 위한 소신인가, 상황을 외면한 도피인가.’

국가 위기상황에 맞선 고건(高建) 총리후보자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10·26 당시 행적=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시해된 79년 10월26일 직후 대통령정무2수석비서관(의전 치안 담당)이었던 고 후보자는 3일 동안 잠적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작고한 김태호(金泰鎬) 의원이 당시 고 수석 밑에서 행정관으로 있었는데 고 수석이 보이지 않아 박 대통령의 국장(國葬) 준비를 도맡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박동진(朴東鎭) 당시 외무부장관도 “박 대통령이 시해된 뒤 장관들이 돌아가며 청와대에서 밤을 새웠는데 고 후보자를 본 적이 없다”고 했고, 노재현(盧載鉉) 당시 국방부장관도 “장례를 치를 때까지 고 후보자를 본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고 후보자는 그러나 “박 대통령 서거 직후 큰딸인 박근혜(朴槿惠)씨의 지시에 따라 청와대 본관에 마련된 빈소에 사흘간 머물렀다”며 “신관에 있던 비서실 직원들은 아마 나를 못 봤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고 후보자는 잠적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10·26 직후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장의차를 주문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본보 취재팀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보존돼 있는 당시 장의차를 점검한 결과, 장의차는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한자동차가 만든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고 후보자는 “당시 현대자동차에 전화한 것은 분명하다”며 “이후 총무처에 국장과 관련된 사항을 넘겼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80년 5·17 당시=80년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당시 대통령정무1수석비서관이었던 고 후보자는 “비상계엄 확대는 군정이라고 판단해 운전기사를 통해 사표를 비서실장실 이송용(李松容·81년 작고) 비서관에게 전달하고 서울 장위동 자택에 칩거했으며 6월7일 사표가 수리됐다”고 주장했다. 운전기사였던 신판근(愼判根)씨는 “80년 5월17일 저녁, 무엇인지 모르지만 당시 고 수석으로부터 흰 봉투를 받아 이송용씨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두순(申斗淳) 당시 대통령 의전비서관은 “최광수(崔侊洙) 대통령비서실장을 비롯해 비서진 누구도 고 후보자의 사표를 본 적도, 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다”며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최 실장을 만나 고 후보자의 해명을 전했더니 어이없다며 웃더라”고 반박했다.

고 후보자는 또 “80년 5월 시국 안정을 위해 계엄령 해제시한을 제시하고 전면 개각을 하라고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고 밝혔으나 당시 비서진 중 한 명은 “고 후보자가 우국충정에서 건의서를 만든 것이 아니라 최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반박했다.

한편 고 후보자가 비상계엄 확대 국무회의에 대신 참석해달라고 부탁했던 김유후(金有厚) 당시 법무담당 비서관은 “할 말이 없다”고만 답했다.

▽87년 6월 항쟁=‘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 사건’ 수습 차원에서 87년 5월26일 내무부장관으로 입각한 고 후보자의 6·10 민주화 항쟁 당시 행적도 논란거리.

고 후보자는 87년 6월8일 내무 법무부장관 합동담화를 통해 “6·10 대회는 불법대회이며 야당, 일부 종교인들, 좌경불순세력이 결합한 집회로 대부분의 국민은 원치 않는다”고 강경 입장을 밝혔다. 고 후보자는 이에 대해 “담화는 내무부장관으로서 정부의 입장을 대변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명동성당 학생 농성과 관련해 “당시 대책회의 등에서 △88올림픽을 앞두고 세계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주고 △바티칸이 반발하면 수출에 피해가 우려되며 △강경 진압은 자칫 계엄령 사태로 번질 수 있다는 점 등 ‘3대 불가론’을 들어 명동성당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주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이상연(李相淵) 안기부 제1차장은 “고 후보자의 ‘3대 불가론’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잘라 말했고, 권복경(權福慶) 당시 치안본부장도 “고 후보자가 평화적 해결을 주장한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었던 한나라당 김용갑(金容甲) 의원도 “당시 평화적 해결을 주장한 것은 안무혁(安武赫) 안기부장과 권복경 치안본부장이었다”고 말했다.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화려한 공직 40년▼

고건(高建) 국무총리후보자는 정권 이양기의 ‘민감한’ 시기마다 말을 바꿔 탔다. 고 후보자는 행정전문가로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양지만 좇는 ‘변신의 귀재’라는 혹평도 하고 있다.

그는 1980년 5·17 직후 1차 변신했다.

당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의 정무수석비서관이었던 그는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반대한다”며 사표를 냈다고 밝혔다. 비상계엄 확대가 사실상 군정(軍政)을 의미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사표를 내고 5개월 뒤 그는 전두환(全斗煥) 정권의 교통부 장관으로 공직에 복귀했다. 고 후보자는 “국보위의 군정체제가 끝나고 헌정체제로 돌아왔으니 본연의 전문분야(행정)로 복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왜 계속 신군부를 반대하지 않았느냐는 반론은 ‘왜 재야를 안 했느냐’는 논법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5공 정권에서만 교통부, 농수산부,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당시 5공 신군부의 한 핵심인사는 “당시 호남 민심을 달래기 위해 이 지역 출신인 고 후보자를 중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정치에 초연해온 그의 행적에 ‘예외’도 있었다. 85년 12대 총선 때 당시 여당인 민정당 소속으로 고향인 전북 군산-옥구에서 출마해 당선했다. 고 후보자는 ‘당시 선택이 민정당의 정치이념에 공감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즉답을 피한 채 “82년경 농수산부장관 시절 시작한 금강하구언 공사를 마무리짓고 싶었다. 12대 의원 때 준공식을 했다”고 말했다.

고 후보자는 97년 3월 총리로 발탁돼 환란(換亂)으로 얼룩진 김영삼(金泳三) 정부의 임기말 내각을 총괄했다.

그는 이어 총리를 그만둔 지 불과 두달 만인 98년 5월 김대중(金大中) 정부의 서울시장 후보로 화려하게 컴백해 6월 지방선거에서 민선 서울시장에 당선했다. 고 후보자는 95년 2월 당시 야당이었던 국민회의의 서울시장 후보 제의는 거절했다.

그는 “관선 서울시장(88∼90년) 때 시작해 이루지 못했던 제2기 지하철공사 등을 마무리짓고 싶었다”고 해명했다.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水西사건 처리 논란▼

노태우(盧泰愚) 정부 시절 여야 정치권의 도덕성을 뿌리째 뒤흔든 수서(水西)사건은 ‘행정가 고건(高建)’의 리더십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고 총리후보자가 당시 서울시장으로서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고 후보자는 “청와대 등의 특혜압력을 끝까지 거부했다”며 ‘소신의 리더십’을 강조한 반면 일부 청문특위 위원들은 “일을 매듭짓지 못한 채 눈치만 살피다가 일을 키워놓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수서사건의 발단은 1988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보주택이 서울의 ‘노른자위 땅’인 수서지구 일대가 조만간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해 이 일대 자연녹지를 사들였다. 그러나 건설부는 89년 3월 수서·대치지구 자연녹지 43만평을 공영개발방식에 의한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했다. 공영개발은 정부가 모든 택지를 사들여 사업을 시행하는 방식이어서 한보에 대한 택지특별공급은 어려워지게 됐다. 따라서 조합주택에 땅을 팔아 넘기고 아파트 건설까지 맡아서 수백억원의 이익을 낼 것으로 기대했던 한보의 ‘꿈’은 물거품이 될 처지에 빠졌다.

고 후보자는 “90년 2월 초 수서주택조합의 택지특별분양 요구에 대해 ‘무주택 서민에게 돌아갈 택지를 특정업자에게 특혜분양할 수 없다’며 분양불가 방침을 통보했다”며 “이후 두 차례나 같은 결정을 했고, 외압을 거부하다가 타의로 시장직을 물러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국무위원을 지낸 한 인사는 “노태우 대통령이 체육활동에 공로가 있던 한보 정태수(鄭泰守) 회장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했고, 정 회장은 수서건을 끄집어냈던 것”이라며 “당시 고 시장은 청와대 눈치만 살피다 당정회의, 건설부 질의, 국회 청원 등으로 시간을 끌면서 한보 로비의 불길을 잡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고 후보자는 “만약 대통령의 뜻인 줄 알았다면 여러 경로를 통해 분명히 매듭지었을 것”이라며 “당시 수서민원 처리불가 입장은 확고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했다.

고 후보자의 후임이었던 박세직(朴世直) 전 시장이 90년 국회에서 서울시로 이첩한 청원문서의 공람(供覽)란에 고 후보자가 서명을 한 것과 관련해 “전임 시장이 결정해서 따랐을 뿐”이라고 밝힌 것도 논란거리다.

고 후보자는 “넘겨온 문서를 보았다는 결재였지 한보의 특별분양 요구에 대한 서울시의 승인과는 다르다”고 했고, K 전 서울시부시장도 “단순히 문서열람을 했다는 뜻”이라고 해명했다.

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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