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성동기/남북 축제의 두 모습

  • 입력 2002년 8월 16일 19시 04분


분단 이후 남한에서 열린 최초의 대규모 남북 민간교류행사라는 ‘기록’을 남긴 8·15 민족통일대회가 16일 막을 내렸다.

백도웅 남측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는 이날 폐막식에서 “우리는 한 페이지의 위대한 새 역사를 썼다”고 말했다. “6·15 공동선언을 굳건히 고수하고 철저히 이행해 나가자”는 공동호소문을 채택하고 독도 수호에 대한 의지를 남북한이 함께 확인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 행사 관계자는 “장관급회담에 이어 민간차원의 민족통일대회에서 남북이 하나의 목소리를 냈다는 점은 앞으로 남북관계 전망을 밝게 하는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6·29 서해교전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에 열린 행사여서 한총련 등 운동세력과 우익단체의 이른바 ‘남남(南南) 충돌’도 걱정됐지만 기우에 그쳤다.

장재언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은 16일 종교부문 상봉모임에서 “자연재해를 당한 북측 인민들에게 지원물자를 보내준 남녘 종교인에게 감사한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했다. 그는 2000년 12월 장충식(張忠植)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북한 비하 발언’을 문제삼아 “장 총재는 죄에 죽고 올바르게 재생해야 한다”고 거친 표현을 썼던 인물이다.

될 수 있으면 남측 언론과 만나는 것을 꺼리던 북측의 태도도 달라졌다. 행사 관계자는 “기자들의 질문에 짧게나마 대답을 하려는 태도는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장면도 있었다. 북측은 사진전에 비전향 장기수의 편지를 전시하겠다며 남측과 마찰을 빚었다. 약속을 깨고 금강산에서 개최 예정인 청년학생통일대회의 날짜를 일방적으로 결정해 발표하기도 했다.

두 문제 모두 손님을 맞은 남측이 양보해 고비를 넘겼지만 이로 인해 일부 행사는 취소되거나 늦어지기도 했다.

116명의 북측대표단을 순수한 민간교류대표로 볼 수 있을지도, 410여명의 남측대표단이 이름 그대로 국민적 관심과 의지를 대표했는지도 의문이다.

축제는 끝났다. 이번 축제의 의미는 좀 더 두고볼 일이다.

성동기 정치부 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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