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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월 30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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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회소설치 이견 못좁혀 |
이들 할머니는 생이별한 뒤 꿈속에서도 그리던 자식 소식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남쪽의 가족과 주위의 친지들도 기쁨을 함께 했다.
▼106세 허언년 할머니▼

“창섭이가 살아있다고, 살아서 자식을 만나려고 이렇게 오래 살아있나 봐….”
3차 남북이산가족 확인자 중 최고령인 허언년 할머니(106·경기 화성군 송산면 독지1리) 는 30일 딸들로부터 아들 윤창섭씨(72)가 북한 남포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 아들 생일이 삼월 열 나흘인데 이번 생일에는 볼 수 있을까”라며 생일상 차려줄 생각부터 했다.
이웃에 살고 있는 딸 정섭(69), 정숙씨(60)도 “죽은 줄만 알고 있던 오빠가 살아있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며 어머니를 감싸안고 울음바다를 이뤘다.
허할머니가 아들과 헤어진 것은 꼭 50년 전인 1·4후퇴 때. 고향인 강원 철원군 임목면 갈현리 두몽동 마을에서였다. 면사무소에서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나간 아들이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마을에서 전투가 벌어져 남편의 이모댁이 있는 화성으로 피란하게 된 것.
정숙씨는 “혹 오빠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면 어머니가 타격을 받으실까 봐 오늘에야 대신 신청한 사실을 알렸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남편을 여의고 허드렛일로 세 딸을 키워 출가시켰고 6년 전부터 딸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고 있다.
이웃 주민들은 “아직 마을을 다닐 정도로 정정하시다”며 “평소에도 아들 얘기를 많이 하셨다”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102세 이상옥 할머니▼

“아들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동지섣달에도 가슴을 풀어헤치고 잠을 자야 했어.”
이상옥(李霜玉·102·강원 속초시 금호동) 할머니는 1948년 돈을 벌어오겠다며 북으로 떠난 외아들 김정우씨(74)가 평남 운곡지구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남한도 좋고 북한도 좋으니 죽기 전에 아들과 함께 살고 싶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씨를 모시고 사는 셋째딸 김정선씨(63)는 “어머니는 몇해 전까지 오빠가 객지에서 배를 곯지 않고 빨리 돌아오라며 부뚜막에 따뜻한 밥을 올려놓았다”며 “어느 날 저녁 오빠를 생각하며 어머니가 손으로 땅을 한자나 후벼파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아들 정우씨는 1남4녀 중 맏이로 강원 고성군 죽왕면 야촌리에서 부모와 함께 농사를 짓다가 48년 8월 “돈을 벌어오겠다”며 청진으로 떠났다.
할머니는 아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한다며 육류는 먹지 않은 채 야채와 된장만 섭취했다고 한다.
북한의 오빠 소식을 접하고 한자리에 모인 정선씨 등 여동생 4명은 “오빠는 북과 나팔을 잘 다루고 코미디언 기질이 있어 동네에서 인기였다”며 “73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100세 서송명 할머니▼

서신교환 대상자로 선정된 서송명(徐松明·100·경기 의정부시 가릉동) 할머니는 30일 한자리에 모인 남한의 7남매로부터 장녀 현성해(玄成海·73)씨가 평양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빨리 만나러 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또 기자를 붙잡고 “우리 딸을 만나게 해주시면 죽어서라도 은혜를 갚겠습니다”며 손을 놓지 않았다.
8남매 중 장녀인 성해씨는 만삭의 몸으로 대동강 북쪽에 살았는데 대동강 다리가 끊기면서 남으로 피란한 가족과 헤어졌다.
남편과 함께 월남한 할머니는 딸을 두고 왔다는 괴로움에 시달리던 남편이 57년 세상을 떠난 뒤 7남매를 키웠다. 자식들은 “큰딸에 대한 죄책감에서 좋은 옷과 음식이 생기면 자식들보다 이웃에 먼저 나눠주는 삶을 사셨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내심 큰 걱정이다. 할머니가 상봉대상자가 아닌 서신교환 대상자이기 때문.
자녀들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께서 반세기를 기다려온 딸의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할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속초·화성·의정부〓경인수·남경현·이동영기자>sunghy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