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EM서울2000]"경호 우선" 시민편의 외면

  • 입력 2000년 10월 20일 18시 31분


20일 0시 30분경 서울 삼성동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행사장 앞 횡단보도.

ASEM 자원봉사를 마치고 귀가하던 K씨(33)가 신호등이 초록불로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도 길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ASEM 정상들을 위한 차량통제 때문에 편도 차로를 임시로 왕복 차로로 운영하고 있으면서도 기존 차선과 반대로 달리는 차들을 위한 별도의 신호체계가 없어 자동차들이 ‘멈춤’ 신호를 보지 못해 쌩쌩 달리고 있었기 때문.

ASEM 행사장 주변에는 수백명의 경찰관이 보초를 서고 있었지만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교통정리를 해주는 경찰은 눈에 띄지 않았다. K씨는 “내가 아무리 나라를 위해 자원봉사를 해도 이런 무심함 하나가 외국 손님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단군 이래의 최대행사라는 서울 ASEM이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운영상의 허점을 곳곳에서 드러내 만 4년간의 준비와 노력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ASEM 관계자들조차 “모든 행사의 초점이 정상들의 경호에만 맞춰져 있어 불필요한 ‘촌티’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행사장 주변을 중무장한 경찰인력이 뒤덮음으로써 ‘국민의 환호 없는 정상들만의 잔치’를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투경찰들이 단체로 식사하는 장면에는 행사요원들조차 얼굴을 찡그릴 정도.

정상들의 이동순서가 국제적 관례인 국가명 ABC순에 따라 준비됐다가 개회를 코앞에 두고 청와대측의 요구로 숙소별 단체 이동으로 바뀌는 등 오랜 준비가 헛수고가 되는 경우도 잦다. ASEM 의전팀 관계자는 “개회식 폐회식 의전은 ASEM 준비기획단, 만찬과 이동은 외교통상부로 나뉘어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모든 일정과 행사를 관리하는 총괄센터가 없는 것도 큰 문제. 정상회의 내용은 외교통상부 외교정책실, 각종 행사준비는 ASEM 기획단이 맡고 있어 국내외 취재진과 외국 대표단들이 관련 사항을 어디 문의해야 할 지를 몰라 허둥대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19일 방한하기로 한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스페인 총리의 도착 시간이 20일 오전으로 변경됐다는 사실이 기자들을 취재장소로 안내하는 취재지원팀에서 확인했을 정도.

한 외신기자는 ASEM 기획단에 나눠진 안내책자에 적힌 팩스로 취재자료를 받으려고 시도했다가 그 번호가 없는 것이어서 낭패를 보기도 했다.

기획단 관계자는 이에 대해 “큰 행사를 치르는 만큼 사소한 실수나 잘못은 있을 수 있지만 최소의 인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형권기자>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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