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봉의 창]"이곳 어머니 생각해 사진만은 안돼요"

  • 입력 2000년 8월 18일 18시 38분


18일 오후 2시 40분경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차출되는 바람에 생이별한 전 부인(70)과 아들(51)을 평양에서 만나고 돌아온 L씨(73)가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입국 게이트를 빠져 나오자 그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취재진은 40대 가량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무섭게 소리를 지르고 팔을 내젓는 바람에 그대로 물러서야 했다.

“취재를 거부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절대 안돼요. 다른 사람 취재하세요.”

L씨가 “이 친구하고는 평양에 가기 전 취재 허락을 했으니 어쩔 수 없다”며 본지 기자를 가까이 부르자 딸은 “어머니도 생각하셔야죠”라며 울먹였다.

하지만 기자가 평양에서의 상봉순간을 취재한 뒤 카메라를 들이대자 딸은 기자의 팔을 끌고 한쪽으로 데려간 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호소했다.

“저의 어머니는 지금 앓아 누우셨어요. 어머니도 물론 아버님의 아내가 있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살아있다 하더라도 북한은 저승보다 먼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죠. 하지만 상봉이 덜컥 이뤄지니….”

그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여자는 여자”라며 “어머니의 상처가 더 깊어지지 않도록 사진만은 찍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먼 산만 바라보며 담배를 피워대는 아버지를 낚아채듯 차에 태워 사라졌다.

<지명훈기자>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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