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5돌 특집]北형제 상봉할 박영일씨 기구한 삶

  • 입력 2000년 8월 6일 18시 53분


박영일(朴英一·76)씨는 요즘 밤마다 취한다. 북쪽에 작은누나와 남동생이 살아 있다는 통보를 받은 지난달 27일 이후 밤마다 소주 한 대접을 들이켜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11년 전 ‘삶의 의지처’이던 아내마저 세상을 뜬 뒤 그는 말수가 줄었다. 그러다 갑자기 날아든 북한의 형제 소식. 며칠 뒤면 그들을 만날 수 있단다. ‘살아 있기를 잘했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내린다.

박씨의 한평생은 지난 세기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 광복군, 해방, 좌우익 대립, 전쟁, 가난, 개발독재…. 그의 얘기에는 그 질곡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한 범부(凡夫)의 삶이 절절이 흐른다.

열살 터울의 큰형 항준(恒俊)씨가 늦은 밤 평북 선천 고향집에 찾아든 것은 그가 열아홉살이던 43년 겨울. 중국에서 7년 만에 돌아온 형은 이튿날 새벽 ‘곧 부를 테니 기다려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그는 다음 날 일본경찰에게 다짜고짜 연행돼 맞고 비틀리는 등 온갖 고문을 다 받았다. 형이 충칭(重慶)임시정부의 베이징공작원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5개월 뒤 그를 업고 귀가하며 통곡하던 아버지, 대야 2개에 가득 핏물과 대소변을 받아내던 어머니…. 그렇게 1년여를 누워지냈다.

‘무지렁이 농사꾼’이던 그의 마음 속에 일본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겨우 몸을 추스를 즈음 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베이징으로 오너라.” 신분을 감추고 식당일을 하던 형이 그를 위해 베이징 일본군 헌병대사령부의 채용증까지 만들어 보낸 것.

44년2월 어느 날 밤 옷가지를 챙겨주며 엎드려 우시던 어머니, ‘살아와야 한다’며 손을 놓지 않던 아버지. 그 날이 마지막이 될 줄 어찌 알았을까.

‘일본군 위장취업’ 생활이 시작됐다. 운 좋게도 헌병대 사령부의 정보과 서기 일을 얻었다. 일본군 동향보고서를 정리하며 베끼고 외워 매달 한번씩 동지들에게 전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사령부에서 기밀이 새고 있다’며 그가 범인으로 지목됐다.

간신히 몸을 피한 그는 ‘진짜 광복군 활동’을 시작했다. 44년12월, 중국 안후이(安徽)성 푸양(阜陽)현 광복군 3지대에서 국내침투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 D데이를 한달 가량 앞두고 일본이 백기를 들 줄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며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해방 조국으로 가는 배에 형과 함께 몸을 실은 것은 46년4월. 설레는 마음으로 몇 날 밤을 꼬박 새며 부산으로 달려왔건만 조국은 갈가리 찢겨 있었다. 길 한가운데 줄을 그어놓고 좌우익이 삿대질해가며 맞서는 장면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펼쳐졌다.

어느 날 광복군의 활약상을 순회 강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여수에서의 첫날 밤, 그는 남로당 청년들에게 테러를 당한다. 그 뒤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목숨 바쳐 꿈꿔 온 해방이 이런 것인가.’

그 무렵 형이 육사 입교를 권했다. 어차피 들어선 군인의 길이니 조국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겠느냐는 권유였다. 46년8월 육사 2기생으로 입교해 졸업 후 소위로 청주에 부임한 그는 소대원을 직접 모집해 “다시 ‘식민지의 개’가 되지 않으려면 오직 강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에게 떨어진 임무는 동족과 싸우는 일이었다. 전국 각지의 반란사건에 토벌대로 투입돼 사랑하는 부하들이 동족의 총칼 앞에 죽어나갈 때마다 동생 임준(林俊·66)씨가 혹시 반란군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위눌리곤 했다. 동기생들이 일으킨 여순반란을 진압할 때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49년8월 허리부상을 계기로 전역했다. 그 뒤 먹고사는 게 막막했지만 “그때 전역하지 않았으면 6·25전쟁 때 얼마나 많은 동족을 내 손으로 죽여야 했겠느냐”며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결혼하고 3남1녀를 키우며 옷장사 막노동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남쪽의 유일한 혈육이던 형은 “이 땅이 싫다”며 85년 미국으로 훌쩍 떠나더니 2년 만에 세상을 등졌다. “그때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말렸어야 했는데….” 박씨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86년 국가유공자로 표창을 받기도 했던 박씨는 “짧은 생애 동안 북의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은 오늘(5일)이 가장 기쁜 날”이라며 “작은누이(79)와 남동생을 만나면 모진 세월 어떻게 견뎠는지 붙들고 통곡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리 세대엔 워낙 앙금이 많았지만 손자들 때에는 하나된 땅에서 한민족이 얼싸안고 잘 살아갈 거요. 형제자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는 세상이 다시는 안 올 거구만. 그런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통일조국의 군인으로 평생을 바치고 싶소.” 그의 작은 소망이다.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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