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0년 6월 27일 19시 22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86년 신민당 유성환의원의 통일국시 발언 때는 민정당 원내총무로 체포동의안을 단독처리했으면서도 95년 국회부의장 시절에는 ‘최악의 협상 결과도 최선의 날치기보다 좋다’고 했다. 소신이 달라진 이유는….
“유의원 문제 등을 강행처리한 경험 등에 비춰볼 때 그런 신조를 갖게 됐다.”
▽엄호성의원(한나라당)
―의정부시와 포천을 연결하는 호국로에 전두환전대통령 찬양 공덕비가 후보자 이름으로 세워져 있다.
“공덕비가 아니라 도로비다. 다만 뒷부분에 이 길을 만든 과정을 기록했다.”
―연간 1억3000만∼1억4000만원의 소득에도 불구하고 98, 99년 종합소득세를 한푼도 내지 않았다.
“변호사로서 사건수임이 없었고, 변호사사무실 고문료마저 야당이 된 뒤 절반으로 줄어 세금 낼 것이 없었던 것 같다. 국회의원 세비에 대해서는 근로소득세를 냈다.”
▽이성헌의원(한나라당)
―유성환의원 체포동의안 처리 때도 ‘당론’이라고 말했고 5공청문회 당시 전두환대통령을 국회에 세운 것도 ‘당론’이라고 말했다.
“과거 정책결정에서 주도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던 종속적 위치였다.”
▽설훈의원(민주당)
―73년 고려대 ‘검은10월단’ 사건 때 기소검사로서 학생들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었는가.
“그때도 학생들의 민주화 정신을 마음속으로 존경했다.”
▽안상수의원(한나라당)
―김영삼 전두환 노태우전대통령을 비난하면서 그들 밑에서 영화를 누린 것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 것 아닌가.
“정치인은 지사가 아니다.”
▽심재철의원(한나라당)
―(김경태 증인에게) 74년 7월 이한동총리서리 부인 조남숙씨 등 두사람과 함께 포천 중리로 주민등록을 옮겼는데 살기 위한 것이었나.
“아니다.”
▽함승희의원(민주당)
―(박원복 참고인에게) 송치 당일 구류신문 담당검사가 이한동후보인가.
“당시 알지 못했으나 뒤에 생각해 보니 최영광검사 같다.”
▽김학원의원(자민련)
―(윤찬모 증인에게) 당시 땅을 살 때 3명의 서류와 통장을 누가 관리했나.
“내가 했다. 이한동후보자는 잘 모를 것이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