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386' 의 부끄러운 술자리

  • 입력 2000년 5월 25일 23시 48분


광주민주화운동은 긴 세월 독재의 질곡에 갇혀 민주화를 열망하던 사람들에게 정신적 지주이자 고향이었다. 소식을 듣고서도 아무도 달려갈 수 없었던 그해 봄 수많은 광주시민들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핵으로 하는 신군부의 유혈 진압에 항거하며 도청앞 광장에서, 금남로에서, 공용버스 터미널에서 꽃잎처럼 스러져갔다.

이번 광주민주화운동 20돌에는 신군부에 의해 배후조종 혐의가 들씌워졌던 사형수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어 참석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도 내려가 여야를 초월한 참배가 이루어졌다. 특히 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과 맞서 싸워 6월 항쟁을 이끌어냈던 민주당과 한나라당 소속의 386 세대 정치 신인과 재야출신 의원들이 함께 참배해 공동의 정치 개혁을 다짐했다.

그런데 이 중 김민석씨 등 여당의 386 의원과 당선자들이 5·18 전야제가 열리고 있던 밤에 분별없는 술자리를 벌였다. 망월동에 추모하러 간 정치인들이 아가씨들과 함께 음주가무로 밤을 지샌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하필 그날 밤 광주에서 부끄러운 술자리를 벌이는가.

당신들이 누구인가. 그저 시정에서 이름없는 삶을 꾸려가는 장삼이사였더라면 아무도 그런 술자리를 문제삼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의 국회의원이라도 그날 밤 그 도시에서는 더 엄격한 도덕적 기준이 적용될 수밖에 없는데 당신들은 바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386 운동권 및 재야 출신들이 아닌가. 그렇게도 지각이 부족하단 말인가.

그날 밤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지켜본 한 여성은 동아닷컴 독자토론 코너에 ‘386 정치인 여러분, 위선의 탈을 벗으라’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김민석의원의 홈페이지에도 성난 네티즌들의 글이 계속 밀려들고 있다. 김의원은 새로운 세대의 리더 격으로 폭넓은 사랑을 받던 정치인이다.

한마디로 이들의 행동은 이번 선거에서 낡은 정치판을 개혁해주기를 기대하며 검증이 덜됐지만 참신성 하나만 믿고 젊은 후보들을 국회로 보낸 유권자들을 크게 실망시킨 행위였다.

술자리 참석자들은 ‘광주를 방문했던 젊은 위원장들’ 명의의 경과보고서를 통해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 정도의 사과로 이번 실수가 지워질 수는 없다. 이런 정신자세로 무엇을 개혁하겠다는 것인가. 그들은 광주에 다시 내려가야 한다. 망월동에 가서 영령들 앞에 무릎 꿇고 잘못을 빌어야 한다. 그리고 정치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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