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선거법협상등 툭하면 말바꾸기 "나부터 살자"

  • 입력 2000년 2월 1일 19시 21분


1일 저녁 국회 본회의 개회를 기다리며 원내총무실에서 대기하던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 “정말 지겹다. 선거법 처리한다고 국회에 불려나온 게 벌써 몇 번이냐”는 등의 넋두리가 무성하게 나왔다.

“국회가 이런 식으로 가면 외부세력에 휘둘리는 결과가 반드시 온다. 이제 군대가 국회를 점령할 일은 없겠지만 설혹 그래도 할말이 없게 됐다”는 극단론까지 들렸다.

이들의 말대로 3당3색에, 299명 국회의원의 이해 관계가 엇갈려 갈팡질팡해온 선거법의 협상과 처리과정은 자결(自決)능력을 상실한 국회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민주당은 국회 선거구획정위의 선거구안을 무조건 수용한다는 당론을 정했지만 지난달 31일 의원총회에서 폭력과 욕설이 터져나올 만큼 일부 의원들의 반발이 거세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모든 것을 걸고 관철하겠다”고 공언했던 중선거구제, 권역별 비례대표제라는 최초 당론은 온데 간데 조차 없다.

한나라당도 이회창(李會昌)총재가 선거구획정위 구성을 제안하면서 획정위안을 전폭 수용한다고 밝혔지만 막상 획정위안이 정해진 뒤 내부반발이 거세자 위헌을 내세워 선거구 재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자민련은 1인2표제는 안된다면서도 이를 기초로 한 석패율(惜敗率)제는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등 당론이 무엇인지조차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지역구(충남 서천)가 없어지게 된 이긍규(李肯珪)원내총무가 “나도 죽을 지경”이라며 의욕을 보이지 않는 바람에 여야 협상에도 큰 지장을 받고 있다는 게 다른 당 총무들의 하소연이다.

이처럼 여야 모두 당론 자체가 오락가락한데 대해 의원들 대다수는 “애초 당론 결정 과정 자체가 비민주적인 탓도 있지만 당지도부의 통제력이 예전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런 현상은 지난달 31일 국회 문화관광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이날 문광위는 여야 3당이 각 2명씩 추천한 방송위원 명단을 의결하는 자리였으나 자민련 구천서(具天書)의원이 자기당 몫 추천 방송위원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며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의결을 포기해야 했다. 다른 당 의원들로부터 “지도부 따로, 의원 따로냐”는 탄식과 함께 “사실 우리도 우리당 몫 위원이 어떻게 추천됐는지 모르긴 마찬가지”라는 자조가 나왔다.

사실 과거 여당에선 핵심부의 지침에 대한 공개적 반발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야당도 몇몇 의원의 항의로 하루아침에 당론을 바꾸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러나 ‘선거법 개악’에 대한 비난여론과 시민단체의 공천부적격자 명단공개 파동에 떠밀리면서 여야를 막론하고 당지도부를 보는 일반의원들의 시각이 달라졌다.“나부터 살자는 이기주의든, 국민을 의식한 제스처든 의원 모두 당지도부의 지침대로 하는 것이 더 이상 ‘보신책’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당지도부는 여전히 ‘당론’으로 만사를 해결하려는 구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의원은 이에 대해 “구속력도, 일관성도 없는 당론을 가지고 총무협상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여야의 안에 대해 각각 개별 투표할 것이면 총무들은 그동안 무엇하러 합의안을 만든다고 협상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차라리 처음부터 모든 안건을 크로스 보팅(교차투표)으로 처리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윤승모기자>ysmo@donga.com

▼선거법 처리 못한 여야/野 "쟁점별 표결" 전격제안 여권 압박▼

여야3당은 1일 선거법 처리문제를 놓고 하루종일 숨가쁜 절충을 벌였으나 입장이 엇갈려 타결에는 실패했다.

○…한나라당은 이날 저녁 긴급 총재단 및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선거법의 쟁점 조항별 표결방식을 제의키로 전격 결정해 여권을 압박. 여야간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 있는 비례대표 선출방식과 선거구 조정안에 국한해 여야 의원들의 찬반 의견을 묻자는 것.

맹형규(孟亨奎)총재비서실장은 “지역선거구 조정안보다는 당론인 1인1표제 관철이 표결처리의 관건”이라며 이같은 표결방식 결정의 배경을 설명.

○…자민련 의원총회에서는 1인1표제 선호론이 우세한 가운데 일부에선 1인2표제 주장을 제기하는 등 당론 확정에 진통.

이처럼 중구난방이 계속되자 이한동(李漢東)총재권한대행은 “국회가 생긴 이래 선거법을 표결처리한 일이 없었다”며 이긍규(李肯珪)총무에게 회기연장 추진을 지시. 이양희(李良熙)의원 등은 “오늘 중에 표결처리를 해야 한다면 현안이 되고 있는 4, 5개 사안에 대해서는 조항별로 찬반표결에 부치자”며 한나라당측의 제안에 동조.

한편 본회의 표결에 참석하기 위해 국회에 왔던 한광옥(韓光玉)대통령비서실장과 남궁진(南宮鎭)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은 표결이 연기될 것이라는 소식에 허탈감을 표시.

○…3당 총무들은 이날 오후9시경 박준규(朴浚圭)국회의장실에서 막판 협상을 재개.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총무는 “여야가 합의하지 못하고 설 이후로 넘기면 국민의 비난을 어떻게 감수할 것이냐”면서 표결 강행을 요구. 그러나 민주당 박상천(朴相千)총무는 “여야가 아직까지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것은 선거구획정위의 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야당 때문”이라고 반격. 자민련 이긍규총무는 “여야가 합의하지 않으면 표결에 참여할 수 없다”고 강조.

이에 대해 박의장은 “내일(2일) 다시 협상해도 마찬가지이니 어지간하면 오늘 결론을 내라”면서 밤11시를 최종 시한으로 통보.

<송인수·정연욱기자>i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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