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안국신/정부-재계의 「빅딜」 기대한다

  • 입력 1998년 3월 25일 19시 59분


어쩌다 우리 경제가 금융위기와 외환위기를 맞게 되었는가. 재벌 주도하의 고차입 고성장전략과 정경유착 시스템이 ‘우물 안 개구리’식 관치경제와 어우러진 탓이라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입장이다. 재벌 개혁과 정부 정치개혁이 새 정부의 화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민 정부의 재벌개혁에 관한 의지는 확고한 것 같다.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서기 전 신(新)여권의 실세들은 ‘빅딜’이나 총수들의 사재(私財) 출연이 재벌 개혁의 요체인 양 말해 왔다. 이것들은 국민의 정서에는 영합할지 모르지만 재벌개혁의 핵심은 아니다.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깨’라는 말처럼 비본질적인 요구들로 재벌들을 몰아세운 결과는 부메랑이 되어 새 정부에 돌아오고 있다.

김대중대통령이 재벌 총수들과 만나 합의한 투명한 기업경영 등 5대 개혁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사항을 좀 더 구체화한 것으로서 대체로 올바른 정책이다. 그러나 최근 재계는 5대 개혁이 새 정부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합의한 것일 뿐 당장 실천할 형편이 못된다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 은행의 방만한 여신이 잘못이지 우리 재벌이 무슨 잘못이냐, 상호빚보증을 해소할테니 은행이 신용대출로 바꿔달라,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부동산과 계열사를 내놓아도 안팔리는데 어떡하느냐는 등 홍두깨를 날리고 있는 것이다.

팔려고 해도 안팔리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그럴 듯한 변명으로 들린다. 그러나 수익성 없는 기업을 높은 가격으로 팔려니까 안팔리는 것이다. 수익성 있는 주력기업을 ‘헐값’에 내놓는다면 쉽게 팔릴 것이다. ‘헐값’이란 예전의 거품가치에 비해서일 뿐 현재로서는 외부에서 부르는 값이 제값이다. 재벌과 금융의 동반 부실이 워낙 중증이기 때문에 ‘전략적 매각’ 운운하며 시간을 끌 여유가 우리에겐 없다.

IMF가 국내 기업들의 금리 인하 요구에 냉담하고 우리나라의 신용 등급이 쉽게 올라가지 않는 것은 재벌들이 원론적 처방을 받아들여 구조 조정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있는 데에도 큰 원인이 있다. IMF가 결합재무제표를 만들고 계열사간 빚보증관행을 고치며 부채비율을 낮추라고 요구한 것은 지극히 원론적인 요구다. 기업의 재무제표도, 정부의 통계도 엉터리이기 때문에 국제적 신뢰를 잃어 외환위기를 촉발했던 것이 아닌가.

정부와 재벌이 서로 방망이와 홍두깨를 휘두른다면 최악의 시나리오도 생각해볼 수 있다. 자금 동원력이 큰 상위 재벌들은 5대 개혁을 무력화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옥쇄’를 각오하고 복지부동하고 있으면 대부분의 중소기업과 하위 재벌들이 먼저 쓰러질 것이다. 그럴 경우 IMF와 정부는 공황상태를 피하기 위해 불가불 재벌개혁을 유예할 수밖에 없다. 국민 경제를 볼모로 한 이런 시나리오는 한낱 기우에 그쳐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재계 29위의 대상그룹이 수익성 좋은 주력핵심사업 부문을 매각해 부채비율과 상호빚보증 규모를 대폭 낮추기로 한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상위 재벌들도 유사한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할 것이다.

합심해 공동 선(善)을 이룬다는 차원에서 재벌개혁과 관련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적어도 두가지가 있다. 첫째, 재계가 요구하는 순수지주회사제도를 속히 도입해야 한다. 5대 개혁이 착실히 추진되면 재벌은 더 이상 옛날의 재벌이 아니게 된다. 따라서 왜 우리나라만 지주회사제를 굳이 금지하느냐는 볼멘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다.

둘째, 정부 정치개혁에 재계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해야 한다. 중이 제머리 못 깎듯 정부 스스로는 자기 개혁을 제대로 못한다. 정부가 재벌개혁을 선도하는 것처럼 재계가 정부 정치개혁을 견인해야 한다.

서로를 개혁하는 이 ‘빅딜’에 대승적인 정경합의(政經合意)가 있기를 바란다.

안국신<중앙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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