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김학준/「北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

  • 입력 1997년 6월 19일 19시 29분


『아니, 이럴 수가!』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에 대해 때때로 들어왔지만, 그래서 그곳에 갇힌 북한 동포들의 「인간의 조건」이 얼마나 열악하고 비참한지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처럼 처절할 줄이야. 어제 아침 동아일보 1면의 「정치범 수용소」 현장 사진을 본 사람들은 너무나 큰 놀라움 속에 엄청난 충격을 받아 그렇게 외치면서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 치밀어 오르는 분노 ▼ 저것을 「정치범 수용소」라는 이름아래 유지해 오다니, 도대체 金日成(김일성)과 金正日(김정일)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무리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다루는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게 마련인데, 이렇게까지 악랄할 수 있을까. 제정러시아의 세계적 문호 톨스토이는 『감옥의 수준이 그 국가의 수준, 그 정권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갈파했다. 그는 제정러시아의 감옥을 한번 본 뒤 그 비인도적 야만성에 분개하면서, 그 뒤 많은 국가들에서 널리 인용되는 「감옥결정론」을 피력했던 것이다. 제정러시아의 감옥은 정녕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반체제적 정치범들을 수용한 감옥은 환경이 너무나 열악해 갇힌 「죄수」들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발광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저 사진에 나오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처럼 야만적이지는 않았다. 거기서는 때때로 독서가 허용됐고 집필도 허용됐으며, 감옥 안에서의 잡역을 통해 비록 적은 액수지만 돈을 벌 수도 있었다. 스탈린 시대의 악명 높았던 강제노동수용소, 곧 귤라그도 저 사진의 북한 「정치범 수용소」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한편에서는 마구 죽어나가기도 했으나, 그래도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증언했듯, 재수 좋은 날에는 생선가시국이라도 얻어 먹을 수 있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살아나올 수가 있었다. 그런데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사진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것은 사진설명 기사 그대로 원시인들의 혈거(穴居)생활을 연상하게 만든다. 황무지에 버려진 저주받은 사람들이 옷가지 하나 변변히 걸치지 못하고 굶주린 채 풀뿌리라도 찾으려고 돌더미 사이를 힘없이 헤매는 모습, 그 가운데서도 어머니인 듯한 여자가 땅에 주저앉은 채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 참으로 많은 독자들이 말없이 울음을 삼켰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비감한 분위기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는 한때 국제 학계에서도 유행했고 국내 학계에서도 동조했던 북한정권에 관한 좌파적 수정주의적 해석이 더 이상 나타나지 못하도록 학문적 및 교육적 노력을 더욱 기울여야 하겠다. 「항일 혁명가」요 「미(美)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전사」였다는 김일성이 북녘땅에 세워 아들에게 물려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감옥국가임이 이번에 극명히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북한은 「가부장적 조합국가」 모델로서 설명될 수 있다느니, 「제삼세계 발전의 사회주의적 성공사례」로 불릴 수 있다느니 하던 일부 사회과학자들의 북한관(觀)이 타당할 수 있겠는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 채 북한이라는 국가의 본질에 접근하자는 뜻이다. ▼ 北 현실-인권 직시하자 ▼ 우리의 북한정책과 통일정책 역시 북한에 대한 냉정한 현실분석 위에서 세워져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 북한의 권력자들과 주민들을 구분해서 접근하는 가운데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는 북한의 민주화가 돼야 할 것이다. 북한을 민주화할 때 남과 북은 정녕 평화통일의 민족적 염원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북한의 인권문제를 국제사회에 꾸준히 효과적으로 제기해야 할 것이다. 물론 북한정권의 반발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인권상황을 일관되게 강력히 제기하게 되면 북한정권은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세계화의 물길은 그 원시적 사회에도 흘러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김학준 (인천대총장·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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