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가 남긴것④]與 대선자금 왜 많이 드나

  • 입력 1997년 5월 2일 20시 07분


지난달 29일 충남 예산 충의사에서 열린 尹奉吉(윤봉길)의사 의거 6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3당대표 가운데 가장 많은 박수와 환호를 받은 사람은 자민련의 金鍾泌(김종필·JP)총재였다.

신한국당의 李會昌(이회창)대표도 『내 고향이 바로 예산』이라고 외쳤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자 이대표의 한 수행원은 『JP가 충청도에 뜨면 어디든지 자기 돈을 써가면서 그림자처럼 박수부대들이 쫓아다닌다』고 푸념했다.

여당이 「돈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여권에서 『조직은 「동전」이 떨어지면 작동하지 않는 「공중전화기」같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온 것은 이른바 「1노(盧)3김(金)」이 대결했던 지난 87년 대선 때였다. 당시 민정당 대통령선거본부 종합기획팀장을 지낸 李年錫(이연석)전의원은 『87년 대선은 16년만에 처음으로 치러지는 직선제선거였기 때문에 선거운동이 공격적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고 당조직을 가동하는데만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이 들었다』고 실토했다.

이전의원의 말처럼 지금 국가적 과제로 대두된 대선자금의 질곡이 잉태된 것은 바로 87년 대선 때였다. 이전의원은 「돈선거」의 연원을 「공격적 선거」로 지목했으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통성을 결여한 군사독재체제의 정권재창출 욕구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당시 민정당의 盧泰愚(노태우)후보 진영은 동책 통책 반책 등 공조직 세포조직망, 朴哲彦(박철언)당시 안기부장특보가 주도한 사조직(월계수회), 이른바 지역사회의 여론주도층 등을 통해 어마어마한 돈을 풀어댔다. 또 시 도 군 읍 면 동 등 행정조직과 각종 정보기관 등도 돈으로 움직였다.

뿐만 아니다. 당시 金泳三(김영삼·YS) 金大中(김대중)후보의 청중 동원력에 맞서기 위해 돈으로 청중을 끌어모으는 유세비용도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뛰어올랐다. 대선 막바지 노후보의 여의도유세는 당시 「4백억원짜리 공사」라는 말이 나올만큼 청중의 강제동원 측면에서 기네스북에 오를만 했다.

노후보 진영에서 핵심역할을 했던 한 관계자는 『노후보가 특히 YS에게 가졌던 「공포감」은 대단했다. 노후보가 당시 全斗煥(전두환)대통령이 직선제 출마 권유를 할때 주저하며 거절했던 것도, 수백억원을 써가면서 여의도유세를 강행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이같은 「돈선거」를 총지휘한 사람은 뒤늦게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 조성사실이 밝혀져 영어(囹圄)의 몸이 된 전 전대통령이었다. 87년 대선이 끝난 뒤 한 관계자는 『대선에만 줄잡아 1조2천억원쯤 든 것 같다』면서 『그같은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을 끌어모을 수 있는 사람이 전대통령말고 또 누가 있겠느냐』고 털어놓았다.

야권의 진단도 비슷하다. 야권인사들은 『여당 조직의 구조와 생리상 막대한 돈을 쓸 수밖에 없다는 측면외에 역대 집권자들이 자신의 후계자를 직접 당선시켜 사후를 보장받겠다는 무리한 욕구 때문에 법과 제도를 뛰어넘어 무차별적으로 당선작전을 폈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즉 전두환은 노태우후보를, 노태우는 김영삼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천문학적 자금과 관권을 동원했고 불법 금권 관권선거가 판을 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趙世衡(조세형)국민회의총재권한대행은 『87년 대선은 정권의 정통성이 없는 군사독재세력이 정권유지를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한 사상초유의 타락선거였다』면서 『그 때문에 지역연고주의를 악용하고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87년 대선의 병폐와 독소가 이른바 문민정권을 탄생시킨다던 92년 대선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됐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다. 3당합당으로 민정당 조직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당시 대선본부의 한 관계자는 『이미 방대한 공조직이 돈맛에 깊이 길들여져 있더라』면서 『돈을 풀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거꾸로 반대편으로 돌아서며 돈을 요구하는 현상이 비일비재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기존 조직원들이 87년 단가(單價)로는 도무지 약발이 안먹혀 「선거 인플레」를 낳았다. 또 당시 민자당은 이질적 정파의 결합체였기 때문에 민정 공화계가 YS에 반발하거나 소극적인 자세로 움직여 이를 추스르기 위해서도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여당은 돈으로 굴러가는 조직인데 기존조직이 「텃세」를 부리면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자 사조직을 운영해 틈새를 메워나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나사본)는 회원배가 운동이라고 해서 엄청나게 회원수를 늘렸고 회원가입 때 여행경비다 뭐다 해서 각종 명목으로 엄청난 돈을 풀어댔다』고 전했다.

이는 바로 3당합당으로 정체성(正體性)이 혼미해진 대선풍토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또다른 진단도 제기된다. 당시 김영삼민자당후보의 선거본부에서 일했던 한 핵심관계자는 『鄭周永(정주영)국민당후보의 등장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국민당이 엄청난 물량공세를 펴며 집권을 노렸고 이 때문에 우리도 다급해진 나머지 돈을 많이 풀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다른 관계자는 기업들의 「보험헌금」도 돈선거가 가능했던 이유로 꼽았다. 그는 『YS의 당선가능성이 높아지자 기업들의 뭉칫돈 베팅이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실토했다. 그는 이어 『특히 대선을 3개월쯤 앞두고는 기업들로부터 집중적으로 자금이 들어왔는데 당시 「2L, 2H」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당시 대선캠프에서는 럭키금성 롯데 한일합섬 한국화약 등을 꼽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나머지 하나가 한보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조차 지난 95년 「노태우비자금」 파동의 와중에서 『당시 이러다간 나라가 망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선후 「나는 기업들로부터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며 92년 대선의 문제점을 한마디로 지적하기도 했다.

朴瓚旭(박찬욱)서울대교수는 『대선자금이 많이 드는 근본적인 이유는 정책대결이 아니고 조직으로 유권자를 동원하고 자금을 살포하는 「노동집약적 선거운동」을 하기 때문에 「인건비」가 많이 들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박교수는 『특히 87년 대선 당시 군정종식 이슈가 제기되면서 대중적 지지기반이 약한 민정당이 세과시를 위해 대규모 동원유세를 강행해 선거 분위기를 혼탁하게 만들었다』고 망국적 선거풍토의 근원을 지적했다.

〈최영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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