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윤상참·이동관·권순활특파원] 북한의 黃長燁(황장엽) 노동당중앙위원회 비서는 지난달 30일 일본에 도착해 12박 13일간의 방일 일정을 끝내고 11일 오후 2시55분 차이나 에어라인(CA)926편으로 도쿄 나리타공항을 떠났다.
도착 당시 공항에는 조총련 許宗萬(허종만)부의장 일행이 직접 나와 방문단 일행을 맞았으며 지나칠만큼 삼엄한 경호를 펼쳐 보도진과 마찰을 빚었다.
황비서는 이튿날인 지난달 31일 조총련 본부를 방문한뒤 곧바로 교토(京都)로 이동해 지난 1,2일 교토에서 관광을 즐겼고 친분이 있는 학자들과 만났으나 공식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는 4일 도쿄 조선대를 방문한뒤 저녁 7시부터 국제문제연구소 주최로 열린 「21세기를 향한 동북아 전망―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입장」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가졌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지극히 철학적인 「인간의 욕망」에 관한 것이었으며 주체사상의 우월성을 은근히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그는 몹시 피곤하고 지친 표정이었으며 강연 내용이 두서가 없는데다 알맹이도 빠져 참석자들을 실망시켰다. 그는 『사전에 준비를 많이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5일에는 조총련 간부 등만이 참석한 이른바 「내부행사」인 조선문제간담회를 갖고 주체사상과 김정일의 주석 취임의 당위성과 사회주의의 재건 등을 강조했다. 그는 7일에는 김정일 탄생 55돌 기념파티를 주재하기도 했다.
황비서는 방일기간중 한국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일절 거절한채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과만 회견했다. 회견 때 그는 상당히 자신있는 태도로 4자회담 등에 대한 의견을 비교적 솔직하게 얘기했다.
그는 철학자답게 매우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석에서는 북한의 장래를 솔직히 매우 걱정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조총련이 김정일비서의 55세 생일 때 북한에 2백여명의 대규모 축하사절을 보내려는 계획에 대해 『이 어려운 시기에 요란하게 행사를 치를 필요가 있겠느냐』며 만류해 북한 체제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간접적으로 내비쳤다(본보 2월7일자 2면 참조).
그는 이번 방일에서 자민당의 외교책임자인 야마사키 다쿠(山崎拓)정조회장과 대북통인 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간사장대리 등 간부를 비롯해 일본 정부의 대북관계자들을 한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따라서 당초 예상됐던 쌀 지원요청 등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렇게 일본 정가와 정부가 그와의 접촉을 회피한데는 지난달 25일 벳푸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이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총리에게 일본 정부차원에서 황장엽을 만나지 않도록 사전에 못을 박은 배경도 깔려있다.
이때문에 그는 빈보따리로 돌아가야할 처지가 됐는데 이번 망명 배경에는 귀국후 뒤따를 책임추궁과 자신의 무능함에서 느끼는 회의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와 관련, 지난달에는 대일(對日)창구이자 일본통이었던 북한의 李種革(이종혁)아시아 태평양 평화위원회부위원장이 자민당과의 쌀 지원회담 등을 원만히 진행시키지 못한 책임으로 좌천성 인사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7, 8, 9일 주체사상 국제연구소가 주최한 「21세기 인간의 지위에 관한 국제세미나」에 참가해 「국제 金日成(김일성)상」 수여식을 가졌다. 10일에는 일본 사민당 이토 시게루(伊藤茂)간사장을 만나 北―日(북―일)국교정상화 협상재개를 촉구했다.
그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경제개방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으며 4자회담에 기본적으로 『고려할 가치가 있다』며 유연한 태도를 보여 「거물」다운 면모를 읽게 했다.
그러나 그의 방일기간중 20년전 니가타(新潟)현에서 발생한 13세 여중생 실종사건에 북한 공작원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일본 정부와 정가에서는 북―일 관계개선에 신중해야한다는 여론이 높아져 그의 행보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일본 정가에서는 그에게 사건 진상을 해명하라는 요구가 터져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한편 황비서의 망명소식이 알려진 12일 오후 일본 정부와 정보기관 등은 사실을 확인하느라 비상이 걸렸으며 동아일보 도쿄지사에도 곳곳에서 문의전화가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