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더미 속에서도 ‘역사학교’ 꾸려온… 21세기 의병대장

김화성전문기자 입력 2015-02-07 03:00수정 2015-02-07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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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뚜기와 함께하는 오뚜기 인생]강기준 다물평생교육원장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의 ‘天下四方最聖地也(천하사방최성지야)’와 발해 3대 문제시대 연호 ‘海東盛國(해동성국)’이 새겨진 거대 암벽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강기준 원장. 그는 “지금 한민족은 다시 한번 웅비할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며 “다물정신으로 똘똘 뭉쳐 글로벌 리더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산청=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강기준(67)은 차돌 같다. 안경 너머 눈빛에 의지가 굳다. 꽉 다문 입술에서 단호함이 읽힌다. 언뜻 한(恨)이랄까 서러움이랄까 그런 것도 엿보인다. 그는 진주중학교 때부터 책벌레로 소문났다. 학교도서관에 있는 3000권을 다 읽어치웠다.

강기준은 7남매(4남 3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과 누나뿐이었다. 아버지는 무데미(저습지) 소작논을 부쳐 자식들을 키웠다. 소출의 무려 70%를 주인이 가져갔다. 아버지는 새벽 5시부터 밤늦게까지 억척스럽게 일을 했다. “내가 너희들을 반드시 잘 키워낼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강기준도 “내가 크면 저 골짜기 논을 다 사버리고 말거야”라고 속다짐을 했다.

“진주 주약동 진터골에서 살았는데 어르신들로부터 6·25전쟁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소년인민군이 총상을 입고 동네 정자나무에 묶였는데, 밤새 ‘어무이∼어무이∼’ 부르며 울더니 아침에 가보니 죽어있더라는 것이다. 진주고 1학년 때 지리산 세석평전에 올라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빨치산 1개 연대가 주둔했다는 자리를 보았다. 그때 난 민족과 역사에 눈을 떴다. 왜 우리민족은 편 갈라 싸우기만 하는가. 힘을 합쳐도 될까 말까 한데 왜 그럴까.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오랫동안 머릿속으로 공글리다가 제대로 된 역사교육만이 그 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민족학교를 세우고 3000명의 ‘역사의병’을 길러 내리라고 다짐했다.”

강기준의 평생 화두는 ‘다물(多勿)’이다. ‘다물’은 ‘되물린다’ ‘되찾는다’ ‘되돌려 받는다’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로 고구려 건국정신이다. 동명성왕(BC 58∼BC 19)은 수천 명의 고조선유민들로 ‘다물군’을 조직해 한나라를 물리치고 고구려를 세웠다. 그 정신은 발해의 건국정신, 고려의 북진정책, 조선의 북벌정책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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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강기준이 ‘옛 영토를 되찾자’고 부르짖는 게 아니다. 그건 현실성도 없을뿐더러 공연히 외교 분란만 일으킨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인의 정체성 주체성을 되찾아 글로벌 리더국가가 되자’는 것이다. 야성과 기동성, 그리고 상무(尙武)와 기술정신. 이러한 진취적 기상을 되찾아 다시 한번 세계를 누비자는 뜻이다. 그러려면 한반도 통일부터 이뤄야 한다. 하지만 군사나 정치통일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니 우선 경제, 문화통일부터 꾀하자는 것이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4번의 대전환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1200년 전후 몽골이 침략하기 전 기간이다. 요나라와 송나라가 쇠락하고 여진족의 금나라가 떠오르던 시기였다. 금은 고려에 대해 시종 우호적이었다. 이때 고려는 내실을 다지고 미래준비에 박차를 가했어야 했다. 그런데 고려는 거꾸로 갔다. 무신의 난에 민란이 50년 동안이나 곳곳에서 터졌다. 두 번째는 1400년 전후 시기다. 원이 쇠퇴하는 틈을 타 고려 공민왕은 요동수복작전에 나섰다. 1만5000명의 군사로 원의 요동통치기관이 있던 동녕부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370년 노국공주의 죽음 이후 공민왕은 애써 수복한 요동에서 병력을 철수해버렸다. 세 번째 전환기는 1600년 전후 임진왜란 병자호란 시기다. 명나라가 점점 기울고 요동의 여진족과 바다 건너 일본이 신흥강국으로 부상했다. 조선은 격변하는 주변정세에 대비하기는커녕 공리공론으로 허송세월을 보냈다. 네 번째는 1900년 전후 구한말 시기다. 조선으로서는 250년 만에 맞은 대전환기였으나 우물 안 개구리로 주저앉아 개혁개방에 실패했고 그 결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강기준은 요즘을 한민족의 다섯 번째 대전환기라고 생각한다. 주변 4대국인 미·일·중·러의 입장이 점점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서고 있다. 민족통일과 융성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그는 이를 절대 놓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올바른 방책을 내놓아야 하고 국론을 결집해서 꽃을 피워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경남 산청 지리산 웅석봉 자락의 다물평생교육원은 한해 1만2000여 명의 교육생이 거쳐 간다. 현대자동차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POSCO 한전 SK KT 등 내로라하는 200여 개 업체 사원들과 임원들이 우리역사와 얼을 배우고 간다.

일반 시민은 물론 주부, 청소년, 군인, 공무원 등도 찾는다. 그들은 기마민족의 상징 몽골식 겔(군막)에서 2, 3일 생활하며 다물정신에 빠져든다. 그 수가 1990년 문을 연 이래 32만여 명에 이른다. 이 중 1만여 명은 ‘다물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각종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강사진도 쟁쟁하다. 신용하, 신세돈, 김동길, 손길승, 손욱, 여상환, 임양택….

“우리나라가 고래가 되려면 우선 일제 잔재부터 청산해야 한다. 인적청산도 중요하지만 무형잔재 청산이 더 중요하다. 자조적 문제의식이나 엽전의식, 식민사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식민지 관료주의도 문제다. 도대체 명문대 엘리트들이 관료가 되겠다고 행정고시에 목매는 게 말이 되는가. 일제강점기 ‘떠받들어지던 관료’ 향수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식민지 억압체제에서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이제 걸핏하면 ‘분노’로 표출되는 것도 큰일이다. 이 조그만 땅덩이에서 왜 우리끼리 목숨 걸고 싸우는가. 일제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조선을 떠나면서 한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울지 마라 일본인이여, 우리는 조선과의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다. 대동아공영의 큰 꿈을 향해 나가다가 미국과의 일전에 져서 이 땅에서 잠시 물러가는 것뿐이다. 우리는 지난 30여 년간 조선인들에게 식민지교육을 해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적어도 100년 동안은 헤매게 될 것이다. 자중지란에 빠져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돌아온다.’ 정말 소름끼치는 말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다물평생교육원 강의실엔 ‘역사는 꿈꾸는 자의 것이고, 모두가 꾸는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글귀가 붙어있다. 칭기즈칸이 전쟁터에 싸우러 나갈 때마다 외쳤다는 구호다. 강기준은 실용주의를 추구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을 외치면서도 제대로 된 농기구 하나, 변변한 저수지 하나 없는 조선시대의 관념주의를 끔찍이 싫어한다. 벼슬만 귀하게 여기고 기술과 경제를 천하게 여긴 그런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어쩌다 우리 모두 잊고 살았네♩ 겨레의 얼과 맥을 이어온 다물♪ 요동벌 떨치던 그 기상으로♬ 통일과 융성의 원동력 되자♪ 우리가 아니면 그 누가 하리오♩ 지금이 아니면 그 언제 하리오♪ 민족의 영광 위해 다물로 간다♬’

다물정신은 위의 다물노래에 오롯이 담겨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의병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한민족은 국가가 이어온 게 아니다. 겉은 국가였는지 몰라도 어려울 때마다 의병들이 나서서 나라를 구하고 한민족의 얼을 되살렸다. 지배층과 정규군이 도망칠 때에도 의병들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고조선의 천지화랑,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 백제의 싸울아비, 고려의 재가화상, 조선의 의병, 일제강점기의 독립군이 바로 그들이다. 가령 고려는 정규군이 10만 명에 불과했지만, 재가화상이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국난 땐 집에 보관해두었던 각자의 무기를 짊어지고 전쟁터로 달려 나갔다. 다물은 21세기 의병이라고 할 수 있다. 2000년 전 한나라를 물리쳤던 다물군처럼 강력한 역사의지로 무장하여 우리나라를 세계 으뜸국가로 만들어야 한다. 올바른 민족정신을 가지면 좌우갈등도 별거 아니다. 우리는 원래 나약한 민족이 아니다. 글로벌리즘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게 우리민족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단일민족은 아니다. 수많은 피가 섞인 다민족국가다. 우린 포용력이 강하다. 세계 모든 종교가 다 들어와 있지만 종교 갈등이 거의 없는 나라가 우리다. 실용주의 개방주의로 활달하게 뻗어나가야 한다. 동아시아 경제공동체가 이루어지면 우리가 그 중심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지금 제대로만 한다면 2030년쯤 세계 11대 거점국가가 될 것이고 2050년쯤이면 세계 2대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1973년 10월, 광주보병학교 특별간부후보생 훈련병 시절. 강기준 원장 제공
▼관사 옆에 아내 무덤… “못 다한 것 모두 해주고 싶은데”▼

강기준의 ‘사랑과 인생’


강기준은 반듯하다. 단단하다. 그는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저 똑바로 앞만 보고 간다. 하지만 천하의 그런 그도 사랑 앞에선 무기력했다. 눈꺼풀에 콩깍지가 씌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멍’ 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학 4학년 때 속도위반으로 ‘학생 아빠’가 됐다. 상대는 한 살 아래의 동네 처자. 1967년 고3 때 그는 잠깐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그해 6·8총선에 대한 ‘부정선거규탄 결의문’을 읽은 죄였다. 시골 이모 집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그녀가 어찌 알고 찾아왔다. 반갑고 고마웠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랑이 싹텄다.

“현실은 엄혹했다. 우선 코앞에 군대문제가 닥쳐왔다. 큰딸이 태어났는데 명색이 아비가 돼 가지고 아이를 부모님이나 처가에 맡기고 갈 수는 없었다. 죽었으면 죽었지 신세 지는 건 싫었다. 그때 마침 대학졸업자 대상으로 ‘보안준사관 모집공고’를 보게 됐다. 5년 의무복무에 7급 공무원 대우. 괜찮았다. 당장 지원했다. 다행히 합격자 30명 안에 들었다. 경남에선 나를 포함해 2명뿐이었다. 그렇게 보안사령부에서 5년 의무기간을 마쳤다. 하지만 난 군을 떠날 수가 없었다. 둘째 딸이 태어나고 1976년 아내가 폐결핵으로 수술을 받았다. 병원비가 엄청났다. 내가 받는 초급장교 봉급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할 수 없었다. 고향근무를 자원해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수밖에. 우선 기본 숙식만 해결돼도 그 부담이 훨씬 줄어들 터였다. 이러구러 난 젊은 날 인생 고비를 고향 진주보안대에서 보좌관생활(1976∼1980)을 하면서 넘길 수 있었다.”

강기준은 성실했다. 하지만 속으론 가슴앓이가 심했다. 학문에 대한 타는 목마름, 바로 지적 영적 갈등이었다. 유신시절 그는 장준하 선생(1918∼1975)의 책 ‘돌베개’를 읽고 감동했다. 김지하 시인의 ‘오적’ 시를 읽고 피가 끓었다. 그분들이 한없이 존경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강기준은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그는 진주에 있었지만 진행상황은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괴로웠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잡혀온 진주 일대 시위학생들을 ‘젊은 혈기’ 등의 이유를 붙여 풀어주는 거였다. ‘DJ추종자’라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온 친구 아버님도 ‘술김에 말실수’라며 집으로 돌려보내드렸다.

그래도 강기준은 늘 뭔가 가슴이 헛헛했다. 틈만 나면 술을 마셔댔다. 급기야 지방간이 왔다. 그때 하늘이 그를 도왔다. 1981년 국방부 행정군무서기관 특별채용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서른셋의 부처 최연소서기관. 보안사령부 정보처 경제과 서기관으로 발령이 나 88서울올림픽 때까지 근무했다. 시국사건과 마주칠 일이 없어 좋았다.

“1988년 부이사관 승진을 앞두고 미련 없이 옷을 벗었다. 주위 사람들이 다들 미쳤다고 했다. 그 좋은 자리를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난 연구소부터 차렸다. 처음엔 후원자 22명이 경비를 대줘 할 만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후원자는 7명으로 줄어들었다. 한 달 적자가 2000만 원에 이르렀고, 빚은 눈 덩이처럼 쌓였다. 그 즈음(1990년) 안기부로부터 ‘보좌관으로 올 수 없겠느냐’며 영입제의가 왔다. 한순간 솔깃했다. 하지만 난 눈을 질끈 감고 단번에 거절해버렸다. 그곳에 가면 몸은 편하겠지만 내 꿈은 영영 사라질 것이었다. YS정권(1995∼96) 땐 난데없이 노조파괴 교육기관이라는 오해를 받아 힘들었다. 정말 억울했다. 민족교육을 하고 있는데 노사교육이라니. 외환위기 땐 직원 42명 중에 7명만 남고 모두 떠났다. 이곳에 남은 사람들도 2년 동안 하릴없이 백두대간만 오르내리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강기준은 역사의 꿈을 믿는다. 그것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상들이 왜 독립운동을 했겠는가. 지도층들이 저마다 왜 사재를 털어 민족학교를 세웠겠는가. 그건 바로 역사의 꿈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가능성이 없다고 가만히 있다면 그건 노예나 다름없다. 역사의 꿈은 되든 안 되든 하는 데까지 해봐야 한다. 강기준에게 다물은 사업이 아니다. 운동이다. 21세기 한민족의 꿈을 이야기하는 역사학교다. 그 이념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앞으로 토굴에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한번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 명상을 해보면 참 신비롭다. 인간은 소우주다. 다른 동물하고 다르다. 요즘 복지문제가 떠오르고 있는데 일자리나 노인문제도 중요하지만 가장 신경 써야 될 게 정신문화를 채워주는 3차복지다. 사람마다 ‘마음을 채워주는 냉장고’가 필요하다. 2, 3년쯤 뒤에 은퇴해서 여행도 다니고 책도 쓰려고 한다. 아내는 2004년 폐질환이 재발돼 고생하다가 2011년 눈을 감았다. 장인 장모님도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내가 밖으로만 나돌다가 집안에 소홀했다. 나를 만나 고생만 하다가 갔다. 관사 옆에 아내 무덤이 있는데, 항상 부채감이 짓누른다. 못 다한 걸 모두 해주고 싶었는데….”

:: 강기준 원장은… ::

▼약력 ▽1948년 9월 27일(음력) 경남 진주 출생 ▽천전초∼진주중∼진주고∼중앙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동국대행정대학원 석사(언론홍보전공) ▽육군준사관(1972∼1980) ▽국방부 행정군무서기관(1981∼1988) ▽명지대 교양학부 객원교수(한국근대민족운동사 강의·1994∼1999) ▽한국국제대학 명예교수, 재단이사장(2006∼2008)

♣현재 ▽사단법인 다물민족연구소 소장 겸 부설 다물평생교육원장(1989∼) ▽충남대 평화안보대학원, 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 특별과정 초빙교수(2009∼)

★훈포장 ▽국민경제교육 유공 대통령표창(1982) ▽IMF IBRD총회 개최 유공 대통령표창(1986)

♠저서 ▽다물 그 역사와의 약속(1996) ▽역사에서 배우는 경영과 리더십(2007)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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