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백헌 충남대 명예교수 기증
월북시인 백석의 시집 ‘사슴’ 1936년 초판본 대전문학관서 전시
대전문학관에 모습을 드러낸 백석의 ‘사슴’ 초판본(1936년). ‘永郞兄白石(영랑 형 백석)’이란 글이 있어 백석이 시인 김영랑에게 선물한 시집으로 보인다. 대전문학관 제공
지난해 12월 개관한 대전문학관은 24일까지 개관 기념 소장 자료전 ‘대전 문학의 향기’를 열고 있다. 이 전시에 ‘귀한 손님’이 얼굴을 드러냈다. 월북 시인인 백석(白石·1912∼1996·사진)이 1936년 1월 20일 펴낸 시집 ‘사슴’의 초판본이다.
‘사슴’은 희귀 시집 수집가 사이에서 보물로 꼽혀온 희귀본 중에 희귀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백석은 선광인쇄주식회사라는 업체를 통해 단 100부 한정판으로 찍었다. 비매품으로 책을 낸 시인은 지인들에게 책을 건넸고, 수량이 적다 보니 당시에도 시집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이었다. 시인 윤동주도 ‘사슴’ 출간 소식을 듣고 시집을 구하려 애썼으나 구하지 못해 직접 도서관에 가서 필사를 했다.
이번 시집은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됐을까. 대전문학관 소장본은 송백헌 충남대 명예교수(78)가 기증한 것이다. 송 명예교수는 문학관 개관 소식을 듣고 ‘사슴’을 비롯해 소장 도서 1만3000여 권을 기증했다. 1950년대 중반 경북대 사범대를 다닐 때 대구의 한 헌책방에서 ‘사슴’을 구입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구입할 때만 해도 가치를 몰랐습니다. 당시는 월북 시인에 대한 평가는 고사하고, 그런 시집을 갖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울 때였죠. 나중에야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았고, 오래전 ‘3000만 원 준다’는 제의도 받았지만 팔지 않았습니다.”
대전문학관에 전시된 ‘사슴’의 표지 안쪽에는 ‘永郞 兄 白石(영랑 형 백석)’이란 글씨가 있다. 백석이 시인 김영랑(金永郞·1903∼1950)에게 시집을 주며 쓴 친필로 보인다. 영랑은 백석보다 9세 연상이다.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는 “백석과 영랑은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선후배 사이로 백석이 후배다. 나이 차가 있어 수학한 기간은 겹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국내에 돌아와서도 선후배로 지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슴’은 사연이 있는 시집이다. 평북 정주 출생인 백석은 주로 북한에서 활동했으나 월북 시인으로 분류됐다. 이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수십 년간 유보됐고, 1988년 월북 문인에 대한 해금조치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됐다.
고서업계에 따르면 ‘사슴’은 2011년 문화재로 등록된 김소월의 ‘진달래꽃’ 초판본(1925년) 못지않게 구하기 어렵다. 반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1948년)을 비롯한 광복 후 시집들은 상대적으로 전해지는 수량이 많은 편이다. ‘하늘과…’는 2011년 한 경매에서 1700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사슴’은 현재까지 모두 4권의 존재가 확인됐다. 이번 대전문학관 소장본 외에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도서관, 그리고 헌책방 ‘고구마’의 이범순 대표가 한 권씩 갖고 있다. 그 가치는 얼마일까. 이 대표는 “수년 전 구입했지만 경로나 구입가를 밝히기 어렵다. 예전에 한 구입 희망자가 5억 원을 부른 적은 있다. 앞으로 가치가 더 높아질 것으로 보여 현재는 팔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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