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도 없이 4주만에 ‘하하하’ 촬영, 칸도 이런 독특한 방식에 매료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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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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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째 칸 진출 홍상수 감독

홍상수 감독(49)은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의 러브 콜을 가장 많이 받은 한국 감독이다. 그는 5월 5일 개봉하는 ‘하하하’로 제63회 칸 영화제(5월 12~23일) 비경쟁 부문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대됐다. 홍 감독은 경쟁 부문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년)와 ‘극장전’(2005년),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의 ‘강원도의 힘’(1998년)과 ‘오! 수정’(2000년), 2008년 감독주간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로 칸에 진출했다. 하지만 상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여섯 번째 칸 영화제 참석을 앞둔 그를 29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영화를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시킬 기회를 다시 얻게 된 게 무엇보다 고맙죠. ‘칸에 다녀왔다’는 사실은 다음 영화 만드는 데 큰 힘이 되거든요. 아, 물론 영화 일 하는 좋은 사람들과 해변에서 또 술 마시며 즐겁게 어울릴 수 있게 된 것도 기쁩니다.”

홍 감독은 영화계 주당(酒黨)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에는 거의 언제나 당연한 듯 소주가 등장한다. 바닷바람과 뜨끈한 복국이라는 알찬 안주를 구비한 ‘하하하’가 예외일 리 없다. 김상경, 유준상, 문소리, 예지원, 김강우, 윤여정, 김규리 등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거푸 기울인 술잔에는 모두 진짜 소주가 채워져 있었다. ‘주사(酒邪) 연기’는 절반만 연기인 셈이다.

“운동 전혀 안 하면서 나이 드니까 이제 술 먹기도 힘들어요. 좀 걸어보기라도 하려는데, 워낙 게을러서 영….”

홍 감독은 2009년 7월 4주 만에 ‘하하하’ 촬영을 마쳤다. 그는 “제작비 회수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처음부터 작정하고 빨리 찍어 최대한 돈을 아꼈다”며 “그래야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있으니까…”라고 말끝을 흐렸다.

‘하하하’는 같은 시기에 따로따로 경남 통영시를 찾았던 두 남자가 서울 한 술집에서 막걸리와 함께 주고받는 추억담을 그린 영화다. 한 복국가게를 중심으로 두 주인공이 엇갈리면서 주변 인물과 얽히는 코믹한 상황을 걸쭉한 막걸리처럼 엮어냈다. 술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영화를 보자마자 ‘이번 주말엔 통영 가서 소주나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헐겁고 나른한 풍광이 묘하게 정겹다.

-통영에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건가요.

“전혀. 처음 갔어요. 아무런 밑그림도 그리지 않고 일단 떠난 거였죠. 배경이 될 공간을 찾다가 이틀 묵었어요. 통영시청 주사분이 나오셔서 여기저기 안내를 해 줬습니다. 동피랑과 서피랑의 주택가를 기웃기웃 다니다 보니 인물과 상황 같은 영화의 재료가 넉넉히 떠올라서 ‘되겠다…’ 생각했죠. 충렬사에서 문화해설가가 안내를 하고 있는 걸 구경하다가 문소리 씨가 맡은 문화해설가 왕성옥 캐릭터를 떠올린 거예요. 주인공들처럼 배도 타 보고, 연극 하는 분들도 만났죠. 신선한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두 남자 주인공은 “좋은 기억만 안주로 삼자”며 첫 잔을 들지만, 취기가 더할수록 이야기는 씁쓸해져간다. 어떤 행위를 하건 미리 뭔가 ‘설정’하기 싫어하는 홍 감독의 성향을 반영한 흐름이다.

“대화에서 ‘좋은 이야기’만 한다는 게 생각보다 힘들죠. 인위적으로 ‘좋은 얘기만 하자’고 작정하는 틀이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그 안에서 뭐가 나올까. 어떻게 배열해야 할까. 스스로 궁금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이리저리 다니다가 발이 닿은 통영이라는 공간이 새로운 이야기 덩어리를 준 거죠. 대본 없이 시작한 촬영 과정의 경험과 반응이 쌓여서 하나의 영화가 됩니다. 적으나마 꾸준히 사랑해주는 관객들이 있는 것은 그런 ‘방식의 독특함’ 때문 아닐까요.”

촬영에 착수하기 전 홍 감독이 생각하는 것은 ‘어떤 계절을 배경으로 하고 싶다’ 정도다. 이곳저곳 다니다가 공간이 정해지면 인물과 관계 등 ‘덩어리’가 생기기 시작한다. 때로는 그 덩어리를 엮어낼 영화의 구성 방식이 먼저 떠오를 때도 있다.

-왕성옥이 사는 언덕배기집이 인상적이던데요.

“동피랑에서 찾았어요. 바다 쪽으로 열려 있는 모습이 좋더라고요. 주인께 부탁을 했더니 흔쾌히 공짜로 빌려주셨습니다. 영화를 즐겨 보는 분은 아닌 것 같았는데… 덕분에 편하게 찍었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다음 영화에서 무슨 얘기를 할지는 당연히 생각도 안 하고 있겠군요.

“계절만 대강 여름. 8월쯤 찍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어요. 아주 젊었을 때는 겨울을 더 좋아했는데 이제 아니에요. 점점 여름이 더 좋아져요. 촬영하기도 수월하고…. 나다니기도 좋고…. 6월쯤 또 몇 군데 정해서 돌아다녀보려고요.”

-대본 없이 촬영 시작하기로 유명한데….

“대본 있어요. 촬영 당일 아침에 써서 문제지.(웃음) 하지만 대사도 세세하게 다 들어가 있는 완성된 대본이에요. 현장에서 나온 배우들 아이디어를 대본에 반영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사투리 빼고는 토씨까지 다 제가 기록해서 나눠주죠.”

-일일드라마 ‘쪽 대본’ 같네요.

“그날 찍을 장면이 3개건 5개건 아침에 다 써요. 1, 2시간 걸립니다. ‘생활의 발견’(2002년) 이후 죽 그렇게 해 왔습니다. 전날 찍은 내용이 다음날의 이야기 전개에 당연히 영향을 주죠. ‘생활의 발견’ 전에는 대강 메모한 레이아웃을 그때그때 고치면서 촬영했어요. 처음에 영화 만들 때는 물론 디테일한 ‘책 시나리오’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하다보니까 짧은 트리트먼트 만으로도 충분히 영화를 찍을 수 있겠더라고요. 그렇게 하니까 현장에서 더 많은 발견을 하게 되고요. ‘영화를 찍는 과정’ 자체에 나를 포함한 많은 것을 맡기는 겁니다.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가 보는 거죠. 과정에서의 만남에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걸 배열해 뭉친 것이 하나하나의 영화로 쌓이는 것 같습니다.”

-장소나 사람 섭외, 예산 배분 짜기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쉽지는 않지만 또 하면 다 됩니다.”(웃음)

-독특한 형식인 건 사실이지만 그 ‘홍상수의 형식’이 이제는 좀 익숙해졌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확 다른 시도를 해볼 생각은 없는지. 애니메이션이라든가….

“살다 보면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으니까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당분간은 일단 여기저기 계속 슬슬 쏘다닐 것 같습니다. 영화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만약 안 하게 되면? 그림 좀 그리고 싶고…. 아주 짧은 소설을 써보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은 영화 만드는 일이 너무 좋아서 다른 생각 안 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처럼 까칠하고 듣기 불편한 얘기를 하던 때와 요즘은 좀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요. 젊은 시절 자신의 영화를 통해 내보냈던 이야기에 지금도 동의하나요.

“내가 말을 잘 못 해요.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그게 내 생각을 표현하는 가장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그러졌다? 부드러워졌다? 글쎄요. 나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변해서 영화도 변하게 된 것 아닐까요. 하지만 오래 전에 영화에서 무언가를 이야기한 주체도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언제나 그 때에 가장 절실하고 궁금한 대상을 다루는 거죠.”

-전작(前作) 제목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못마땅하지는 않은지.

“영화를 어떻게 보느냐는 온전히 관객 마음입니다. ‘어떻게 보여 주겠다’고 구체적으로 생각하면서 영화를 만들어 본 적은 없어요. 내 안에서 튀어나온 사유들이 내 식으로 뭉쳐져 하나의 형식을 얻은 거죠. 미리 의도한대로 영화를 만든다기보다는 영화를 만들면서 ‘내가 영화를 위해 사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다 찍고 난 다음 늘 내 영화가 어떻게 나올까 궁금한 건 그 때문이겠죠. 영화를 만드는 일은 계획을 미리 짜고 어떤 특정한 메시지를 추구하는 작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작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 공간, 날씨, 선택한 배우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그때그때 내 속에 쌓이는 것들의 배열을 찾는 작업이죠. 뭐든 미리 정하고 가는 방식에 거부감이 이는 성격이에요. 한두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의도를 만들어놓고 거기 맞춰서 영화를 찍어내는 방식은 제 것이 아닙니다. 어렴풋이 품었던 의도가 있었을지라도 그것을 뛰어넘는 예상 밖의 무언가가 제작 과정에서 나오기를 기대해요. 뭔가 뚜렷한 의도가 있을수록 모든 행위가 거기 몰려 제한되잖아요. 결국은 의도가 그냥 결과가 될 뿐…. 재미없죠. 처음의 의도가 얼마나 잘 수행됐느냐만 살피면 되니까요. 의도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정에서 발견하고 만나는 것들과 자유롭게 춤추면서 반응하는 것이 내 영화이고요. 책상머리에 앉아서 딱 정한 것을 찍어내는 게 아니에요. 과정에서 발견하는 것들이 전체를 이뤄나가는 큰 부분이 되기를 바라는 것.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는 어떤 한계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것….”

-관객의 반응에는 개의치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에 몰두하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늘 궁금합니다. 설령 나와 생각이 많이 다른 관객일지라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살피면서 영화를 있는 그대로 봐준 뒤에 들려주는 의견은 언제나 고맙고 즐겁습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dongA.com에 인터뷰 전문과 동영상


▲홍상수 감독의 칸영화제 진출작 ‘하하하’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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