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사진사랑 이야기]<4>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

  • Array
  • 입력 2010년 4월 23일 03시 00분


코멘트

“평생 사랑해온 음악… 피사체서도 리듬 느껴져 기업경영에 큰 도움”


《사람마다 오감의 발달은 다르다. 사진을 하면 시각과 피핑(peeping: 들여다 보기)기능이 좋아지고 음악을 하면 청각이 예민해진다. 그런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시각적 언어인 ‘사진’에 도전을 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제대로 된 음악 마니아라면 처음엔 몰라도 얼마 후 음감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사진을 찍는 렌즈의 특성을 이용해 피사체에서 리듬감을 찾아낼 수도 있고, 피사체가 리듬감을 갖도록 앵글을 독특하게 갖거나, 특정 음악에 맞는 피사체를 골라내는 방법으로 말이다. 거기에다 작품 제목에 ‘안단테(느리게)’ ‘포르테(세게)’와 같은 음의 속도나 높낮이를 나타내는 음악적 용어를 활용하면 보통 사람도 그 사진이 어떤 분위기인지 쉽게 어림짐작할 수도 있다. 남들이 사진에서 못 느끼는 음악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사진으로 구현하려는 한 음악애호가, 아니 아마추어 사진가가 있다. 대한전선 양귀애 명예회장(이하 양 회장)이 주인공이다.》


2006년 양 회장이 삼성경제연구소의 ‘CEO를 위한 사진과정’을 듣게 된 것은 지인의 반 강압적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관심사는 오페라와 골프, 그에겐 유일한 취미이자 운동이었다. 한데 문제가 좀 있었다.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등 평생을 음악과 함께한 사람으로서 오페라에 푹 빠져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3년여 동안 오페라 강좌를 들은 뒤부터 그는 ‘아이다’를 관람하고 나면 본인이 진짜 비극의 주인공 ‘아이다’가 된 것처럼 가슴 아파하는 등 자신을 오페라 속 비극의 주인공과 동일시했다. 한마디로 작품에 너무 빠져버린 것.

양 회장이 좋아했던 운동인 골프도 마찬가지였다. 구력 30년에 여성으로 괜찮은 실력인 핸디캡 20 정도를 유지했던 그는 무주CC에서 2주일 간격으로 두 번 홀인원을 기록한 적도 있다. 하지만 발목, 허리 등에 조금씩 이상이 생겼다. 이를 알게 된 주변 지인이 한번 시작하면 뭐든 끝까지 몰입하는 그를 위해 사진을 권유했던 것인데 결국 인생에 새로운 물꼬를 트게 되었다. 남산 언저리로 촬영을 나온 양 회장에게 사진에 관한 얘기를 들어 본다.

―사진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처음 사진을 접한 것은 2006년 삼성경제연구소 CEO를 위한 사진 강좌를 들으면서부터였어요. 내게는 평생 사랑하고 좋아하는 음악이 있었기 때문에 과정을 마친 뒤에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그런데 사진실력이 아니라 회장님을 좋아하는 회원들이 뽑았다며 무조건 기수 회장을 맡으라는 거예요. 이후 동기들끼리 모이는 사진촬영대회에 내가 처음 참여했는데, 그날 회원들이 내 사진을 대상으로 골라주셨어요. 그때 여러분이 ‘음악을 하셔서 보는 눈도 남들과 다른가보다’라고 격려해 주셨는데 아마도 그게 도화선이 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도 정말 싫었으면 안하셨을 것 같은데….

“발목이 아파 골프치기도 어렵고 오페라에도 너무 빠졌다는 생각이 들면서 여기서 나를 건져야겠다는 생각을 스스로 할 때였어요. 조를 지어 치는 골프나 실내에서 하는 음악이 아닌 야외에서 내 호흡대로 설렁설렁 다니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취미나 운동이 무엇인가 생각해 봤죠. 둘 다 딱 맞는 것이 사진촬영이었어요. 사실 제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은 카메라 자체에 대한 두려움, 즉 기계치였기 때문이었는데 이를 극복하고 나서는 사진에 빠져들었죠.”

삼성경제연구소 CEO를 위한 사진과정의 관계자 말에 따르면 다른 CEO의 경우 수업에 올 때면 지난번에 배운 내용을 대개 잊어버리는데 양 회장은 꼬박꼬박 예습복습을 했고 사진 관련 책도 읽는다고 전한다.

―그 다음엔 어떻게 하셨나요.

“내가 음악뿐 아니라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시나 에세이를 무척 좋아해요. 사진에 몰두하던 어느 날부터 사진을 보면 이것은 어떤 음악일까, 이 다음 문장이 무엇일까 이건 어떤 오페라를 닮았네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거예요. 사진을 보면서 음악과 스토리를 찾기 시작한 거예요. 그때부터 그런 음악 냄새 나는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뭘 찍어야 할지 고심하게 되더라구요. 또 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이나 각자 접근방법은 다르지만 똑같이 미를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예술은 궁극적으로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오랫동안 음악을 해온 사람으로선 사진을 음악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생소한 접근 방법보다 손쉬울 수 있고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거죠. 궁극에는 같은 감동에 다다르니까요.”

―그 뒤에 사진 보는 눈에 변화가 생겼겠네요

“이전엔 TV를 보면 아무 생각이 안 들었는데 이제는 장면마다 아 저렇게 앵글을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어요. 올해 눈이 많이 왔잖아요. 눈을 어떻게 찍을까 생각하다 보면 일상의 풍경 속에서 새로운 세상이 발견되는 거예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해요. 세상은 볼 수 있는 만큼 보이는구나 싶더라고요. 그러면서 목표도 생겼어요. 일단 제가 경영하는 무주리조트 달력을 찍고 싶어졌어요. 그냥 리조트 풍경을 멋지게 찍는 것이 아니라 무주리조트가 매달 보여주는 감성, 즉 이번 달 같으면 새싹에서 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음감있게 찍어 보는 거죠. 잘 되면 대한전선 달력을 만들고 개인전 까지도 해볼까요?(웃음).”

―음악적 사진 접근법이 흥미로운데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예를 들어 망원렌즈로 피사체를 당겨보면 멀쩡한 배경이 흐려져요. 음악적으로 크레센토(점점 세게)가 되었다가 포르티시모(아주 세게)가 되거나 피아니시모(아주 여리게)가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다양한 렌즈의 특성이 음악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걸 의식하지 않더라도 찍어 놓은 사진이 렌즈의 특성을 이용한 만큼 음악성을 지니고 있어 나만의 음악 감성으로 사진을 이해하는 방법을 터득한거죠. 다른 분야는 제가 잘 모르고 접근하려면 아직까지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특별히 좋아하는 사진 소재가 있나요.

“TV에 나오는 그 수많은 사진기자처럼 내가 다큐멘터리 스타일이나 현장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찍을 형편도 아니잖아요. 주로 풍경사진이에요. 그중에서도 좋아하는 풍경을 ‘선택과 집중’을 통해 골랐죠. 하늘, 구름, 지평선, 바다, 바람, 나무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계절에 따라 모양이 바뀌고 날씨, 시간에 따라 모양이 바뀌잖아요. 이를 평생에 걸쳐 시리즈로 꾸준히 작업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되도록 신선한 공기와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야외로 스스로를 억지로라도 끌어내야겠다는 마음이 그런 소재를 고르게 만든 것도 같아요.”

어떻게 찍을까
생각하다 보면
새로운 세상이
발견되는 거예요

렌즈만 바꿔도
사진의 강약이 달라지죠

―사진을 접하면서 또 다른 일상의 변화도 있으셨다던데….

“집에 둥그런 원탁이 있는데 거기 내 작품들이 쫙 깔려 있어요. 비싼 것은 아니지만 그림도 개인적으로 컬렉션을 좀 했는데 그것보다 내 작품을 더 걸고 싶어졌고 사무실이든 집이든 개인적 공간에는 내 작품으로 하나씩 바꾸고 싶어졌어요. 다른 분들에게도 내 사진을 자랑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그렇다고 사진작가로서 타이틀을 걸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아니고요. 그렇게 하면 생활 속에서 사진 때문에 내가 행복해지기 때문이죠.”

―바쁘신데 사진과 접촉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단체로 가는 것은 ‘포토 앤 컬쳐’ 정기 촬영 모임뿐이고 나머지는 혼자서 찍거나 소개받은 작가 선생님과 한 달에 한 번 몇 시간 정도 함께합니다. 주로 국내외 출장이나 내가 주관하는 음악회 등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역량을 늘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나지 않으면 차를 타고가다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풍경을 보면 차문을 열고 그냥 찍는 경우도 많아요. 어떤 때는 비서한테 신문이나 관련 자료를 읽어달라고 하고 차안에서 사진을 찍죠. 나도 나름 10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는 시(時)테크주의자인데 그게 제대로 시테크를 활용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웃음).”

―오너의 이런 변화에 임직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무주리조트에서 열리는 ‘무주 뮤직페스티발’이나 ‘세터데이 안단테’ 같은 음악회에서 제가 자주 사진을 찍으니까 그쪽 팀장급 이상은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카메라를 다룰 줄 알게 되었어요.(웃음) 그보다 근본적으로 대한전선이 국제금융위기 이전에 벌인 사업 때문에 요즘 회사 분위기가 그리 좋지만은 않아요. 그럴 때일수록 오너가 좋은 문화를 흡수해서 올바른 정신과 기가 충만해져야 제대로 경영을 할 수 있고, 이는 곧바로 사원들에게 영향을 미쳐 그들의 사기진작과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하시는 경영인들이 요새 많이 늘었다는 느낌입니다.

“기업인들 가운데 사진을 하시는 분이 여러분이 있는데 사진이든 사업이든 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시는 모습에서 배울 점이 많아요. 그런 분들은 다 그 위치에 오를 만큼 나름의 장점이 가진 분들로 저의 벤치마킹 대상입니다. 전문 작가는 아니지만 이달 28일 전시회를 여는 한국저축은행 윤현수 회장님의 ‘손금’이나 ‘밤바다’ 사진에 많은 공감이 갑니다.”

―카메라장비는 뭘 쓰시나요.

“요즘은 사진을 처음 배울 때 ‘포토 앤 컬쳐’ 총무가 추천해준 올림푸스 펜 EP―1을 가지고 다녀요. 렌즈는 17mm 렌즈와 14∼42mm 렌즈, 2×컨버터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큰 카메라에 비해 가볍기 때문에 제 나이에 손목에 부담이 없어 좋고요. 제가 찍는 실력에 비해 사진기 성능이 훨씬 좋은지 사진이 잘나오는 것 같아 만족합니다.”

―20여개 이상의 전문 강좌를 들으셨는데 사진에 관한 관심도 변할 수 있겠습니다.

“전문 강좌는 주로 경영에 관한 것이고 취미로서 사진은 평생 함께할 것 같아요. 영원한 동반자이기에 어디까지 시점이나 목표를 정할 필요가 없지요. 다만 경영자니까 회사 상황에 따라 사진에 대한 관심이 부침을 거듭하더라도 꾸준히 함께할 작정입니다.”

혹자는 부유한 경영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기업가 집안으로 시집간 양 회장에게 사진취미도 재벌의 여러 호사생활 중 하나라고 폄하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예순네 해의 삶을 살아오면서 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인물이다. 친정 오빠인 양정모 회장이 경영하던 국제그룹의 해체, 결혼 후 자식이 생기지 않아 12년 동안 했던 맘고생한 일, 오랜 시부모 부양, 남편과의 갑작스러운 사별, 그리고 그 뒤 대주주로서 두 아들과 함께 회사경영의 책임에 대한 압박감 등을 안고 살아왔다. 그런 삶 속에서 갖게 된 사진취미는 호사가 아니라, 바쁜 일상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유일한 숨구멍 이었다.

양 회장이 경영과 음악으로 단단히 뭉쳐진 바위라면 사진은 그 틈새에 뿌리내린 소나무 같다는 느낌이다. 꾸준히 발전을 거듭해 음감이 담긴 사진, 양희은의 노래처럼 ‘저 들에 푸르른 소나무’ 같은 사진을 수확하길 기대해 본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