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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3월 9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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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안전 지키다 숨진 아들
다음 세상 행복하게 살기를
며칠전 철거민 분향소 찾아
그분들도 편히 잠들길 빌어
“49재 때 태울 유품들을 정리하다가 남훈이가 경찰 하면서 받아온 표창장을 붙들고 한참을 울었어요. 근무복이며 트레이닝복, 내의까지 모두 차 트렁크에 실어놨는데 아들 사진까지는 태울 수 없더군요.”
김 경사의 49재를 하루 앞둔 8일 집 근처에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 응한 김 씨는 전북 무주군 적상산에 위치한 안국사(安國寺)에 들렀다가 막 서울로 돌아온 길이라고 했다.
‘나라를 편안하게 만들 사찰’이라는 이름의 이 절에서 김 씨는 나라의 안전을 지키다 숨진 아들이 부디 다음 세상에서는 좋은 곳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살기만을 부처님 앞에 빌었다고 했다.
세상을 떠난 지 49일째 되는 날, 망자(亡者)가 불법을 깨달아 다음 생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비는 불교식 제사의례인 49재를 앞둔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였다. 아들의 49재는 9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5동 원불교 신림교당에서 열린다. 이어 아들이 잠든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추모 행사를 갖는다.
아들을 잃은 뒤 시작된 불면증은 수면제를 먹고 겨우 잠들어도 두 시간이면 눈이 떠질 만큼 그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끼니를 제때 먹지 못하는 날이 늘면서 78kg이던 몸무게가 67kg으로까지 줄었다. 원래 심장이 약했던 김 경사의 어머니는 아들을 잃은 충격에 혈압이 올라 아직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개인택시 운전사인 김 씨는 아들의 죽음 이후 운전대를 놓는 날이 늘었다. 교통신호를 잘못 보고 주행하다 사고 위기를 겪었다.
아내의 병원비와 생활고에 자신이 몰던 개인택시를 팔 생각까지 했던 김 씨지만 2년 전 아들이 구입한 승용차는 아직 처분하지 않고 집 근처 주차장에 그대로 세워 두고 있다.
아들의 손때 묻은 승용차를 보면서 잠시나마 ‘아직 남훈이가 살아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랠 수 있기 때문. 나중에 손녀(김 경사의 딸)에게 ‘이게 네 아빠가 타고 다니던 차란다’ 하고 물려주고 싶은 생각도 있다.
“제 아빠가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어린 것이 영결식 날 고사리 같은 손으로 흙 한 주먹을 쥐어서 무덤에 올려놓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며칠 전 김 씨는 철거민 측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을 다녀왔다. ‘아들의 49재 전에 한 번은 찾아가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오리라’ 진작부터 마음먹었던 일이다.
부의금 10만 원을 담은 봉투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김 씨는 “유족들께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찾아왔다’고 말씀드렸다”고 전했다.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도 49재에 찾아오겠다는 의사를 전해 왔더군요. 저는 아들에게 진압을 명령한 경찰 관계자도, 시위자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정부든 누구든 나서서 시위자 유족들의 마음도 헤아려 아직 영안실에 누워 있는 분들이 편히 잠들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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