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前대통령 회고록 탈고]발췌 요약

  • 입력 1999년 12월 31일 19시 05분


《동아일보는 지난해 12월31일자에 이어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 회고록의 주요 부분을 추가로 발췌, 소개한다. YS 회고록은 주요한 정치적 사건들을 자신의 입장에서 기술, 당사자들의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대통령을 지낸 정계원로의 개인사적 기록이라는 점에서 YS의 주장을 그대로 옮겼다. 호칭 등의 표현도 가능한 한 원문을 살렸다.》

▼어린 시절▼

통영중학 시절 일본인 교장 기타지마(北島)는 한국 학생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몹시 심한 인물이었다. 그는 점심시간에 도시락 검사를 해서 김치가 있으면 냄새가 난다고 빼앗아 내던졌고 조회시간에도 “조센징은 더럽다”며 한국인 욕을 했다.

마침 기타지마 교장이 진해여중으로 전근을 가게 돼 2학년 학생들이 교장의 이삿짐을 부두까지 날랐다. 이삿짐에서 당시 귀하기 짝이 없던 설탕이 몇포대나 나와 나는 이빨로 포대를 물어 뜯어 설탕을 줄줄 흘리며 부두로 갔다.

설탕이 절반 이상 줄어든 것을 본 기타지마는 통영중학 와타나베(渡邊) 교감에게 전화를 걸어 누구 소행인지 색출하라고 했다. 교감선생이 “누가 그랬는지 나오라”고 하니까 애들이 다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갔다. 비록 일본인이지만 우리에게 동정적이고 인간적이었던 교감선생님은 나를 교감실로 데려가 일부러 큰 소리로 야단을 치더니 물이 든 양동이를 들고 서있으라 하고 금방 수업에 들어갔다. 적당히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6·25 피란생활▼

50년 6월27일 친구 임필수(林弼洙)와 함께 그의 고향인 경기 이천군으로 피신했다. 밤에는 어머니 생각이 나 베갯머리가 흥건히 젖도록 남몰래 울었다. 누군가 식칼을 가슴에 품고 자면 꿈을 꿀 수 있다고 해서 수건에 식칼을 감아 품고 잤는데 끝내 꿈을 꾸지 못했다. 나는 아직까지도 꿈 같은 것을 꾸어 본 기억이 없다.

하루는 임필수의 삼촌이 술이 거나해져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 온 마을이 삽시간에 발칵 뒤집혔다. 나는 “기왕 이렇게 됐으니 우리가 마을을 사수하자”면서 남자들을 모아 일종의 마을 치안대를 조직했다.

이틀 후 이천군 인민위원장이 부하 몇명을 데리고 나타나 이들을 흙벽돌로 쌓은 창고에 가두었다. 마을 복판에 태극기를 달았고 야음을 틈타 인근 지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했다. 때마침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해 인민군들은 후퇴하면서도 마을을 압박 포위하며 공격해왔다. 나는 필사적으로 탈출을 해 위기를 모면하고 쌀 한말을 얻어 상인으로 가장하고 서울로 다시 피신했다.

한번은 광주 부근의 한 다릿목에서 인민군 보초의 검문에 걸려들었다. 보초는 통행증을 보자고 했지만 내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보초는 나를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는 곳으로 데려가더니 몇 걸음 물러서서 방아쇠를 당겼다.

나는 반사적으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보초가 자기 위치로 돌아간 뒤 보니 총탄이 내 발바닥을 스쳐간 것이었다. 참으로 하늘의 도움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정치 입문▼

창랑 장택상(滄浪 張澤相)선생과 관계를 맺게 된 계기는 웅변 때문이었다. 서울대 문리대 재학 시절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나는 2등을 차지해 외무부장관이던 창랑선생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1등은 고려대생이던 고(故) 송원영(宋元英)이었다.

국회 부의장이던 창랑선생의 요청으로 그의 비서가 됐다. 52년 봄 창랑선생이 국무총리로 옮겨갔을 때 나도 총리 비서관으로 옮겨 보좌했다. 틈틈이 거제의 지인들에게 편지를 띄웠고 고향 사람들을 당시의 임시수도였던 부산으로 초청하는 등 내 나름으로 출마 준비를 했다.

54년 5월20일 제3대 총선에 거제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출마했다. 선거 도중 뜻밖에도 골치아픈 사건이 터졌다. 고무신 공장을 경영하던 장인께서 사위를 돕는다고 흰고무신 1만켤레를 보내 온 것이 말썽이 된 것이다. 그 때만 해도 흰고무신은 최고의 신이어서 소문이 삽시간에 온 섬으로 퍼졌다.

고무신을 나눠주었다간 선거법에 걸려 당선 무효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유권자들은 “고무신을 왜 나눠주지 않느냐”고 난리였다. 나는 고무신 전부를 우리 배에 실어 마산 처가로 돌려보냈다.개표 결과 내가 2만770표로 민국당의 서순영후보와 무소속의 이채오후보를 누르고 압승했다. 약관 26세의 최연소 의원이 탄생한 것이다.

▼내각제 파동▼

90년 가을, 내각제 각서 파동의 연원은 3당통합을 선언한 그해 1월2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합을 위한 회담에서 노태우(盧泰愚)가 내각제를 논의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잠시 언급했지만 내가 앞으로 얼마든지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반대해 더 이상의 논의는 없었다.

노태우는 5월9일의 전당대회를 앞두고 내각제를 당의 공식입장으로 확정짓고 싶어했다. 전당대회를 준비하던 김동영(金東英)은 협상대표들이 내각제에 합의한다는 내용의 문안을 수첩에 적어서 내게 가져왔다. 나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내각제 개헌 문서화에 반대했다.

그러자 노태우가 노재봉(盧在鳳)비서실장을 내게 보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해왔다. “내각제라도 한다고 해야 다른 계파에서 통합을 흔쾌히 수용하지 않겠습니까. 합의각서는 절대 외부에는 발표하지 않겠습니다.”

일요일인 5월6일 박준병(朴俊炳)민자당사무총장이 상도동으로 찾아왔다. 내각제 합의각서 서명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런 각서가 왜 필요하냐”고 묻자, 그는 “세 계파가 통합하기 위해 이런 형식이 필요합니다”라고 하면서 나와 노태우, 김종필 세 사람이 한 부씩 보관하되 어떤 일이 있어도 공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합의각서를 청와대 금고에 보관해 두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나는 “내각제를 반대하나 세 계파의 융합을 위해 필요하다면 서명을 해주겠다”고 말했다.

절대 공개하지 않겠다던 합의각서의 존재사실은 불과 23일 만인 5월29일 언론에 보도됐다. 5개월 뒤인 10월25일 한 언론은 합의각서의 사본을 공개했다. 각서는 고의적으로 유출된 것이 분명하다. 물론 노태우의 지시없이 각서가 유출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71년 대선▼

70년 9월29일 신민당 후보경선 전당대회 1차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내가 2차투표에서 김대중에게 역전패를 당한 이유는 1차투표 직후 김대중과 이철승 사이에 당권을 건 흥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1차투표가 끝나자마자 이철승의 총참모 조연하(趙淵夏)와 대회장 입구 장막 뒤에서 만나 자신의 명함 뒤에 각서를 써주었다.

이철승의 표를 자신에게 몰아 줄 경우 “11월의 정기 전당대회에서 당수로 이철승씨를 지지하기로 하고 상호 합의각서를 교환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치인의 약속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의외의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았으나 단상에 올라가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씨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입니다. 나는 김대중씨를 위해 거제도에서 무주구천동까지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지 갈 것입니다.”

나는 1차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최다득표자로서 김대중후보로부터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온다면 이를 흔쾌히 수용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와의 대결을 앞두고 두 사람의 40대후보, 그것도 경상도와 전라도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공동전선을 형성한다면 그 파괴력은 막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의는 오지 않았다. 71년 대선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은 4월18일 서울 장충단에서 열린 야당의 유세였다. 그러나 나는 이날 안타까운 심정으로 충남지역의 벽촌을 돌아야 했다. 김대중후보의 선대본부는 서울집회에서 나를 뺐다. 나는 충남 아산의 면소재지에서 비를 맞으면서 쓸쓸한 유세를 했다. 나의 유세에는 한 사람의 기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71년 4·27 대선은 박정희의 승리로 결판이 났다.

▼10월 유신▼

72년 유신이 선포되자 나는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박정희는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켰고 똑같은 이유로 유신을 선포한 것이었다. 나는 독재정권과 싸우기 위해 나 자신의 심신을 근본부터 바꾸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그때부터 나는 하루에 몇갑씩 피우던 담배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광주 민주화운동▼

80년 5월23일 나는 광주사태가 심상치 않게 번지고 있음을 알고 성명서를 만들어 가족을 통해 몰래 밖으로 내보냈다. 성명은 국내외의 보도기관에 전달됐으나 외신에만 보도됐을 뿐 국내에서는 단 한글자도 활자화되지 못했다.

나는 연금으로 외부 출입이 완전히 차단돼 있었다. 하루는 상도동으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가 찾아왔다. 작달막한 키의 클라크 참사관과 같이 온 글라이스틴 대사는 내집에서 저녁을 들며 두 세시간 가량 머물렀다. 나는 “이런 만행만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전두환을 비난했다.

글라이스틴 대사 역시 신군부의 무자비한 행태를 강하게 성토했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다녀간 지 일주일쯤 뒤에는 마에다(前田) 일본대사가 상도동을 방문했다. 글라이스틴 대사와 마에다 대사의 방문은 나에 대한 위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국과 일본의 전두환 만행에 대한 항의의 메시지라고 느껴졌다.

▼미래의 대통령▼

경남중학 시절 나는 하숙방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붓글씨로 써붙여 놓았다. 한번은 동기생인 김우현 김종학 등이 하숙방에 놀러 왔다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종이를 떼어 버렸다. 내가 다시 써붙여 놓았더니 또 떼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짓을 하려면 내 하숙집에 오지마라”면서 친구들에게 화를 냈다. 결국 친구들은 나의 포부가 진심임을 이해하게 됐다.

▼결혼▼

51년 음력 설을 앞두고 고향집에서 할아버지가 위독하니 빨리 거제로 내려오라는 전보가 날아왔다. 황망히 내려갔더니 어른들이 결혼을 서두르기 위해 만든 구실이었다.

다음날 배를 타고 아버지와 함께 마산으로 가 세 집을 돌아다니며 선을 봤다. 첫번째 집에 들러 커피 마시고 잠시 처녀하고 이야기하고는 일어나 두번째 집으로 가서 똑같이 반복하는 식이었다.

선을 보기는 했으나 결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일을 핑계 대고 난처한 처지에서 빠져 나왔지만 무엇인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마산에 배를 내리자 내 발길은 세번째 선을 본 손(孫)씨 댁으로 가고 있었다. 그 처녀가 나의 평생 반려가 된 손명순(孫命順)이었다. 마산에서 ‘경향고무’라는 고무신공장을 경영하던 손상호(孫相鎬)씨의 2남7녀 중 맏딸로 이화여대 약학과 3년에 재학중이었다.

두 달쯤 뒤인 3월6일 결혼했다. 아내와 나는 모두 대학 재학중이었고 나이는 내가 불과 이틀 빠른 동갑내기 23세였다.

지금까지 50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는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자 정다운 벗이며 모진 고난을 함께 겪어 온 고마운 동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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