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 막히면 소화도 막힌다… 영조도 시달린 체증의 원인[이상곤의 실록한의학]〈176〉

  • 동아일보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시골 잔디밭이나 둑방에 자라는 띠풀의 어린싹을 경상도에서는 ‘삐’라고 불렀다. 봄철에 잔디밭 사이로 뾰족하게 올라오는 은빛 풀잎이 바로 그것이다. 껍질을 까서 안에 든 부드럽고 하얀 속살을 씹으면 껌처럼 쫄깃하면서 약간의 단맛이 난다. 삐는 소나무, 칡, 쑥과 더불어 봄철 심심한 아이들의 특별한 간식 노릇을 톡톡히 했다.

어릴 적 동네 친구가 삐를 너무 많이 먹다 체증(滯症)에 걸려 크게 고생한 기억이 있다. 당시 친구는 갑자기 숨조차 쉬기 힘들어하면서 배도 불러와 곤욕을 치렀다. 동네 병원에 갔더니 당장 개복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 가족들이 울고불고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결국 그 친구의 체증은 한의원에서 ‘중완침’을 맞고 가라앉았고, 신기한 경험을 한 친구는 훗날 한의사가 됐다.

체증의 증상은 아주 다양하다. 피로, 두통, 소화불량, 목이 막히거나 속이 답답한 느낌, 메스꺼움, 호흡 장애, 어지럼 등 모두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증상들이다. 더욱이 이런 체증 증상은 심근경색의 전조 증상이나 췌장염 증상과도 비슷해 절대 간과할 수 없다.

조선 최고의 장수왕이었던 영조(1694∼1776) 또한 체증으로 고생했다. 문제는 영조가 약 복용을 거부할 정도로 한약 먹는 것을 고역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실제 기록에도 영조가 “내가 동궁으로 있을 때 본래 묵은 뿌리와 같은 약재를 믿지 않았고 또 약 복용을 매우 싫어하였다. 약을 지어서 버려두는 것이 많았다”고 말한 대목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영조도 체증이 너무 자주 발생하자 억지로 한약(육군자탕)을 복용했다. 영조 재위 13년의 기록에는 “복용하면 당장 체증이 가라앉는데 육군자탕의 효과인 것 같다. 예전에는 복용하면 한 식경이 지나도 오히려 상복부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복용 즉시 내려간다. 그 덕분인지 요즈음 들어 체증이 모두 없어졌다”고 적혀 있다.

영조의 체증은 소화기관의 기능성 운동장애가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영조가 선천적으로 소화기관이 약해 체증에 자주 시달린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영조의 경우와 달리 신경성으로 발생하는 체증도 많다. 소화는 부교감신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과도한 스트레스는 소화 작용을 방해한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거나 부담스러운 사람과 식사한 후 체증을 자주 겪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옛말에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는 말이 있다. 사실 체증 유발 물질이 위장에, 그것도 십 년씩이나 있을 리는 없다. 한의학에서 ‘체한다’는 의미는 어떤 음식물이 거기 머물러 있다는 게 아니라 음식물의 기(氣·에너지)가 위의 운동을 방해하고 있음을 뜻한다.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는 뜻이다. 예부터 체했을 때 바늘로 손을 따고 위장을 흔들기 위해 등을 두드리는 행위도 결국 막힌 기를 뚫기 위한 것이다.

민간요법에 따르면 오징어를 먹고 체했을 때는 불에 태운 오징어를 우려낸 물을 먹어 치료한다고 한다. 오징어는 날것일 때 부드럽지만 구우면 딱딱해진다. 하나의 물질 속에 음(陰)과 양(陽)이 공존하는 셈이다. 오징어의 물질적 성분은 이미 위를 거쳐 장에서 흡수되거나 배설됐지만, 오징어의 에너지는 몸에 남아 체기를 일으킨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태운 오징어를 우린 물을 마시면 음양의 균형이 맞춰지면서 체한 기운이 쑥 내려가리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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