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소설가일주일 전, 나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도서상(Los Angeles Times Book Prize)의 초청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LA)를 방문했다. 지난해 발표한 소설이 픽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다. 상도 상이지만, 8년 만에 미국을 다시 찾는다는 사실과 더불어 20세기의 신화들이 조립되고 부서져 온 도시를 방문한다는 생각에 몹시 설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가 바로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한 ‘E.T.’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될 것이다.
이번 여행은 예상대로 영화와 문학의 배경들을 마주하는 경험이었다. 첫날, 숙소였던 빌트모어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복도에서 나는 LA가 언제나 내 안에 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빌트모어 호텔은 영화 ‘고스트버스터즈’의 주인공들이 첫 유령을 잡으려 했던 곳이다. 이 외에도 ‘파이트 클럽’, ‘오션스 일레븐’, ‘보디가드’, ‘오펜하이머’ 등 유명 영화와 TV 시리즈의 단골 배경으로 등장한다.
시상식이 끝난 후 나는 그리피스 천문대를 찾았다. 제임스 딘 주연의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서 첫 칼싸움 장면이 촬영된 장소다. 고교를 배경으로 절망에 빠진 10대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지극히 미국적인 장르를 개척한 바로 그 영화다. 천문대 테라스에서 나는 흥분한 코요테들이 짖는 소리를 들었다. 경찰 헬기 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LA의 사운드트랙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극장과 TV에서 마주하던 화려한 모습과 상관없이, 한국에서 수년간 살아온 내 삶에 깊이 맞닿아 있는 또 다른 호기심이 일었다. 바로 LA 코리아타운이다. 열다섯 살 무렵 TV 뉴스를 통해 1992년 LA 폭동을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로 시작됐으나, 잘 알려져 있듯 LA의 한인 사회까지 휩쓸며 시가전으로 끝난 사건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한인들이 소총을 들고 지붕 위에 진지를 구축했던 ‘가주마켓(California Market)’이 아직 남아 있는지 검색해 보기도 했다. 예전 건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코리아타운의 여러 구역을 걷다 보면 폭동 당시와 비교해 전혀 변하지 않은 당구장이나 슈퍼마켓, 태권도장, 식당 등이 들어선 작은 상가들이 여전히 많이 보였다.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참고로 코리아타운은 한국계 미국인들만 사는 곳이 아니며, 거대한 라틴계 커뮤니티와 공존하고 있다. 식당 이름은 ‘에스칼라(Escala)’로, 동네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 6가의 목 좋은 코너에 있는 오래된 스페인풍 저택에 자리 잡고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자랐고 LA로 이주한 한국계 사장, DJ OG Chino의 독특한 삶의 궤적을 증명하는 곳이다. 콜롬비아식 삼겹살 튀김인 치차론과 한국식 LA갈비가 한 접시에 나오는 메뉴를 먹는 동안 오래된 살사 곡들이 흘러나왔다. 콜롬비아와 한국 모두를 향한 향수병이 뒤섞여 기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LA에서 가장 유명한 타코 중 하나가 된 ‘김치 타코’가 바로 코리아타운의 푸드트럭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굳이 덧붙여 본다.
에스칼라에서 두 블록을 걸어 ‘단성사’로 갔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관인 ‘단성사’에서 영감을 받은 포장마차 술집이었다. 이곳은 현지 20대들 사이에서 무척 인기가 많은 듯했다.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굴뚝에서 바비큐 연기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웨이터와 요리사들은 군복과 유사한 바지와 ‘R.O.K.A(대한민국 육군)’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워싱턴에서 나를 보러 LA까지 날아온, 한국에서 오래 거주했던 스페인 출신의 기자가 자리에 앉자마자 너무나 그리웠다며 다급히 보쌈을 주문했다. 보쌈에는 굴을 넣은 무생채가 곁들여져 나왔는데, 서울 종로3가에서 먹던 맛과 똑같았다. 제주도 소주가 너무 빨리 동나는 바람에 미국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 소주를 마셔야 했던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이 ‘천사의 도시’의 포장마차를 나와 유령이 떠다닌다는 숙소로 돌아가면서, 나는 왜 1992년 코리아타운 폭동을 다룬 한국 영화나 소설이 존재하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없다. 미국 내에서 한국인과 라틴계의 길이 교차하기 시작한 곳, 이토록 극적인 사연을 품고 있는 이 동네 전반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언젠가 LA를 다시 찾기 전까지,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 한국 소설이나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눈엔 아름다운 괴물 같았던 이 도시로의 여행을 완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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