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신광영]좋은 판결은 과거도 보고 미래도 본다

  • 동아일보

신광영 논설위원
신광영 논설위원
내란 사건과 김건희 여사 사건의 판결이 하나둘 나오고 있다. 법정엔 검사들이 있지만 이들은 국민 한 명 한 명의 대리인일 뿐이다. 만약 12·3 계엄이 성공했다면, 그래서 김 여사가 지금도 매관매직을 일삼고 국정을 주무른다면 최대 피해자는 국민일 수밖에 없다. 재판의 당사자로서 판결을 판단할 권리가 국민 각자에게 있다. 앞으로도 줄줄이 이어질 재판을 우리는 어떻게 관전해야 할까.

입법자들이 상상도 못 했던 초유의 사건들

법관은 판결할 때 사후적 관점과 사전적 관점을 함께 고려한다고 한다. 미국의 법학자 워드 판즈워스가 쓴 책 ‘법은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나오는 대목이다. 과거에 벌어진 일을 공정하게 따져 죄에 걸맞은 책임을 지우는 게 사후적 접근이라면, 사전적 접근은 미래에 유사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판결로써 바람직한 규칙을 선언하는 것을 뜻한다. 두 관점이 균형을 이룰 때 판결은 설득력을 갖는다. 단순 절도범에게 경각심을 주겠다며 이례적 중형을 선고하면 억울한 피고인들이 생기고, 횡령을 저지른 기업인에게 집행유예를 남발하면 횡령해도 남는 장사라는 잘못된 신호를 주게 된다.

그런 점에서 한덕수 전 총리 1심 판결은 어떨까. 재판부는 한 전 총리가 국무회의를 소집해 계엄에 합법적 외관을 씌워주고, 국정 2인자로서 견제의 의무를 저버린 죄를 무겁게 봤다. 23년형이 선고된 것에 대해선 응분의 죗값이란 의견과 함께, 내란 모의에 관여하거나 주도적으로 가담한 것도 아닌데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사전적 관점에서 보면 울림이 큰 판결이 아닐 수 없다. 나라가 위태로워질 걸 알면서도 불의에 동조하는 기회주의적 공직자에게 어떤 후과가 돌아오는지, 고위 공직에 오를 사람은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각오해야 하는지를 선명히 보여줬다. ‘제2의 한덕수’를 막는 효과가 강력할 것이다.

김 여사 사건 1심 재판장은 선고에 앞서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하고, 권력자든 아니든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경우에도 예외 없이 적용돼야 할 중요한 원칙이다. 재판부가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과 명태균 관련 혐의를 무죄로 본 것도 사건 기록을 다 보고 심사숙고한 법관의 판단이 존중돼야 한다. 불만이 있더라도 2심, 3심까지 지켜보는 게 우리의 사회적 합의다.

다만 김 여사가 통일교로부터 숙원 사업을 도와주는 대가로 그라프 목걸이와 샤넬백 등 7000만 원이 넘는 금품을 받은 사실이 인정됐음에도 형량은 징역 1년 8개월에 그쳤다. 알선수재죄 법정형이 5년 이하 징역이고 통상적인 선고 범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판결은 대통령 배우자가 국정을 농단하고 뒷돈을 챙긴 죗값이 고작 1, 2년 감옥살이라는 메시지로 발신된다. 법의 단죄가 이 정도라면 ‘V0’란 존재의 해악에 충분한 경종이 될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제2의 한덕수, 제2의 V0 막는 판결이어야

솜방망이 판결을 탓할 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 대비해 미리 법을 고쳐놓지 그랬냐고 할 수도 있다. 사법부는 이미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입법부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다루기로 역할 분담을 한 건 맞지만 그 경계가 늘 명확하진 않다. 국회가 모든 구체적 상황을 상정해 법을 만들 순 없기 때문에 법관이 개별 판결을 통해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더구나 위로부터의 내란과 영부인의 국정 사유화는 입법자들의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 초유의 사건이다. 참고할 만한 판례도 거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재판은 처음 가보는 길을 통해 질서를 바로 세우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입법의 미비와 판례의 부재를 핑계 삼아 법관이 뒤로 숨어선 안 되는 시기인 것이다. 과거를 공정하게 돌아보면서도 미래에 정의로운 선례를 남기는 판결이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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