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명령쇼’ 이면에선 시장 반응 살펴
中도 “거래 여지 높다” 보고 기회 노려
속수무책 韓 경제, 이념보다 액션 필요
여한구 피턴슨국제연구소(PIIE) 선임위원·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미국 워싱턴을 휩쓴 유례없는 한파로 미 의회의사당의 원형홀(로툰다)에서 거행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은 8년 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4년 전 의사당 폭동에 이은 하원의 탄핵, 34개 죄목의 유죄 평결, 2차례의 암살 시도 등에도 불구하고 8년 만에 압도적 승리를 거두며 컴백한 그에 대한 지지율은 역대 최고를 찍었다.
도열한 미 빅테크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배경으로 삼은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신은 “250년의 미국 역사상 가장 시련과 도전을 많이 받은 대통령”이며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라고 하는 신의 뜻”이라고 선언했다. 고대 그리스의 판테온 신전을 본떠 만든 원형홀의 이미지까지 더해 19세기 초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저버리고 스스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떠올렸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아메리카 퍼스트’를 실현하라는 신의 뜻으로 죽을 고비에서 살아 돌아왔다고 믿는 초강대국의 스트롱맨이 이끌 4년은 세계 정치경제 질서에 롤러코스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취임 첫 주의 과격하고 공격적인 행정명령의 회오리 속에서도 필자는 2가지 사례에서 트럼프 2기의 또 다른 단면, ‘실용주의’를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는, 10∼20%의 일반관세 부과 발표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애착이 크고 2기 통상정책의 상징처럼 돼 버린 일반관세는 실행될 것이다. 하지만 속도 조절을 한다는 것은 시장의 반응을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어떻게’ 하면 경제에 부정적 효과를 최소화하며 시행할지를 두고 내부 강경파와 온건파가 논쟁 중이라고 전해진다. 일부 워싱턴 전문가들은 야생마 같은 트럼프를 길들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수단 중 하나가 주식시장이라는 얘기를 한다. 주가가 폭락하며 경제에 비상등이 켜지면 월가 베테랑들과 억만장자 기부자들로 둘러싸인 트럼프 측에서 시장의 시그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둘째는, 트럼프 1기와 조 바이든 정부 및 의회, 대법원에서까지 틱톡 금지를 추진하던 것에서 180도 방향을 틀어 ‘실용주의적 딜메이킹(dealmaking·거래 성립)’을 제안했다는 점이다. 틱톡을 캠페인에 활용해 젊은층에서 30%가 넘는 지지를 이끌어 낸 것이 강경한 대중(對中) ‘원칙’을 바꿨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분 50%를 미 기업이 갖게 되면, 중국의 최신 기술을 습득하면서도 안보 등 민감한 부분은 보호할 수 있다고 본다. 중국으로서도 틱톡이 완전히 문을 닫는 것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딜이 될 수 있다.
2주 전 하버드대, 베이징대, 싱가포르국립대 공동 주최로 싱가포르에서 열린 트럼프 시대하의 미중 경쟁에 대한 논의에 참가했다. 중국 엘리트층의 사고를 접할 수 있었던 기회였는데, 중국은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건 중국에 대한 견제가 심해질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다만 바이든 정부는 민주주의, 인권 등 ‘이데올로기와 원칙’을 중심에 놓아 타협의 여지가 많지 않은데, 트럼프는 실용적이라 딜메이킹을 할 여지가 더 높다고 봤다. 또한 우방국 사이에서도 균열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 그 틈을 중국이 비집고 들어갈 기회가 있을 것으로 여겼다. 중국이 트럼프 1기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대응해 봤자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교훈을 얻었으니, 단호하게 대응하는 것처럼 보이되 확전은 자제해 적당한 선에서 빨리 딜메이킹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중국 버전의 ‘실용주의적’ 접근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정치는 자욱한 안개에 싸여 있고, 경제는 비상등이 이미 켜진 상태이다. 밖에서는 안갯속 깜빡이는 불이 잘 보이는데, 안에서는 애써 무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실용보다는 이념이, 통합보다는 갈라치기가 우선인 듯하다. 경제를 정치로부터 디커플링하겠다고는 하는데 액션은 안 보인다. 단기적인 시장 불안뿐만 아니라 중장기적인 경쟁력이 더 우려된다.
지금은 냉혹한 현실 인식으로 ‘리셋’하는 것이 급한 시점이다. 세계는 실용을 앞세워 경제와 기술패권에 사활을 건 경쟁을 하고 있다. 작년에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유권자들은 예외 없이 이념보다 경제를 선택했다. 정치가 안정될 때까지 몇 개월을 기다리기에는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이 너무 엄중하다. 트럼프 취임식에서 본 것처럼 주요 재계 리더들을 포함해 권한대행 체제의 정부, 여야가 비상협의체를 구성해 반도체특별법 등과 같은 한국 경제의 생존이 달린 이슈에서는 대국적 견지에서 과감한 결단을 하는 액션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그러면 한국의 거버넌스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를 걷어내는 최선의 시그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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