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옛말… 경영권 소송 1년 새 53% 급증[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2월 12일 23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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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는 오너 일가 경영권 분쟁
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가족 간 유대감 약화되고
명분보다는 실리를 우선… “내 몫 찾자” 달라진 세태 반영
과도한 상속세 부담도 요인… “관련株 무작정 투자는 위험”

강우석 경제부 기자
강우석 경제부 기자

가업 승계, 상속 등을 둘러싸고 대기업 오너 일가들 사이에서 파열음이 잇따르고 있다. 한국 경제 태동기를 이끌었던 기업의 상당수가 3, 4세 경영에 돌입했지만 혈육 간 ‘불편한 동거’가 마지못해 이어지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세대가 내려가며 유대 관계가 약해진 데다 상속 후 오너 일가의 지배력도 떨어져 ‘내 몫’을 챙기려는 기류도 강해진 탓으로 풀이된다. 재계와 금융투자 업계에선 이 같은 대기업 일가 내 분쟁이 앞으로 보다 빈번해지고 심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 가족 전체 분쟁으로 ‘확전’ 양상

12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기업들의 경영권 분쟁 소송 건수는 총 268건이었다. 1년 전(175건)보다 약 53% 증가한 수준이다. 특히 최근 들어선 대기업 오너 3, 4세 사이의 다툼이 잦아지는 모양새다.

지난해 12월 한국앤컴퍼니그룹(옛 한국타이어그룹)에서 벌어진 ‘형제의 난’은 경영권 분쟁이 가족 단위로 확산된 사례로 회자된다. 형제간 갈등에 아버지는 물론이고 누나, 친척까지 가세해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당시 장남 조현식 고문은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추진하면서 장녀 조희경 한국타이어나눔재단 이사장과 차녀 조희원 씨를 우호 주주로 맞이했다. 방어하는 입장인 차남 조현범 현 회장은 조양래 명예회장과 큰아버지(조석래 효성 명예회장)가 이끄는 효성그룹(효성첨단소재)을 우군으로 확보했다.

MBK의 공개매수가 실패하면서 형제간의 다툼은 조 회장 측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조양래 명예회장을 겨냥한 법적 다툼은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앞선 2020년에도 조 회장이 그룹의 후계자로 발탁되자 다른 형제들이 즉각 반발하며 조 명예회장에 대해 성년후견 심판을 청구한 바 있다. 성년후견이란 고령, 장애, 질병 등으로 의사 결정이 어려운 성인에 대해 후견인을 선임해 돕는 제도다.


올 들어선 형제와 모녀 간의 경영권 다툼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도 했다. 한미약품그룹이 지난달 12일 OCI그룹과의 통합을 발표하자 고(故) 임성기 한미약품 창업주의 장남 임종윤 사장과 차남 임종훈 사장은 이에 반발하며 17일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임 창업주의 아내인 송영숙 회장과 딸인 임주현 사장이 제대로 된 검토와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당시 임종윤 사장은 “이번 통합은 절차상 문제가 있으며 우호 지분을 모아 승부를 볼 것”이란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일단락됐더라도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고 갈등이 이어지기도 한다. 구본성 전 아워홈 부회장은 지난달 8일 여동생인 구지은 부회장 대표이사, 구명진 사내이사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소했다. 구 전 부회장은 고(故) 구자학 아워홈 창업주의 장남이자 회사 지분 38.6%를 보유 중이지만, 2021년 6월 여동생 세 명과의 경영권 다툼에서 패해 해임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아워홈 측은 “고소 관련 내용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관계가 불분명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내에서 가치투자 1세대로 꼽히는 이채원 라이프자산운용 의장은 “장기간 동업, 가족 경영 등을 해 온 대기업들조차 3, 4세대 경영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사이가 멀어져 분쟁을 겪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유대감 약화, 상속세 부담도 영향
그동안 대기업에서 형제간 다툼은 선대에서 후계 구도를 명확히 정리하지 않았을 때 주로 발생해 왔다. 2000년 현대그룹, 2015년 롯데그룹에서 벌어졌던 ‘왕자의 난’이 대표적이다. 최근 벌어지는 오너 3, 4세 간의 분쟁은 과거 사례들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평가가 많다. 적통이 누구냐를 두고 싸우기보단 주식, 상속액 등의 실익을 챙기기 위한 모습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한 대형 회계법인 대표이사는 “오너 일가의 경우 아래 세대로 갈수록 명분 대신 실리를 우선시하는 분위기”라며 “창업주가 일궈 놓은 가업을 이끌기를 원치 않는 3, 4세도 많고, 가급적 현금을 상속받아 본인들이 원하는 삶을 살길 희망한다”고 귀띔했다.

형제간 갈등이 남매, 모녀 등으로 확산된 배경엔 달라진 가족 문화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경영권, 상속 분쟁 과정에서 참여를 꺼려 온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이전에는 대기업 일가에서 결혼한 딸이 출가외인으로 간주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의 권한이 강해지고, 여기에 각자도생 문화까지 맞물리면서 결혼한 오너 3, 4세 여성들도 ‘내 몫’을 찾으려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한국 특유의 유교 문화에 자본주의가 결합되면서 다양한 부작용이 생겼고 많은 3, 4세 여성들이 유류분을 못 받은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며 “많은 대기업 총수 피상속인들이 장자를 지나치게 우대해 왔기 때문에 ‘형평성’을 문제 삼는 자녀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일각에서는 과도한 상속세 부담도 오너 간 경영권 분쟁을 부추기는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OCI그룹과의 통합 과정에서 불거진 한미약품그룹 일가의 갈등은 한국 기업이 처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 창업주가 2020년 별세하자 대주주 일가는 5000억 원에 달하는 상속세를 마련해야 했고, 이를 위해 송 회장과 임주현 사장이 OCI그룹과 합병하는 ‘묘수’를 찾아냈다. 당초 사모펀드 라데팡스파트너스에 지분을 팔아 상속세 재원을 확보하려 했으나 이 거래가 불발되자 다른 카드를 부랴부랴 찾은 끝에 나온 방안이었다. 하지만 OCI그룹과의 합병은 결국 경영권 분쟁의 씨앗이 됐다.

김경률 청운택스컨설팅 대표세무사는 “상속세율은 기본적으로 최소 50%인데 오너 3, 4세들의 경우 납부 자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에 대한 고민이 크다”며 “가업상속공제가 있지만 해당 제도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혜택을 못 보는 중견기업도 많은 상황”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 경영권 분쟁주 ‘묻지 마 투자’ 주의해야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상장 기업의 경영권 분쟁을 주가에 호재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양측이 모두 주식을 더 많이 보유하기 위해 경쟁하는 상황이 주가 상승 요인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최근 분쟁이 펼쳐진 기업들의 주가는 매일 롤러코스터를 탔다. 한국앤컴퍼니의 주가는 공개매수가 진행된 지난해 12월 5일부터 22일까지 1만5850원에서 2만3750원 사이를 오갔다. 해당 기간 한국앤컴퍼니의 하루 평균 거래량은 335만2182주로 11월 일평균 거래량(32만 주)의 10.5배에 달했다. 경영권 분쟁이란 재료를 가지고 수많은 투자자들이 ‘단타 대회’를 펼친 결과다.

심지어 한국앤컴퍼니의 경우 공개매수 과정에서 선행매매 의혹이 제기돼 금융감독원이 거래 내역을 직접 들여다보고 있다. 조 고문과 MBK가 공개매수 계획을 밝히기 직전인 지난해 11월 20일부터 12월 4일 사이 한국앤컴퍼니 주가는 30.1% 상승했다.

한미사이언스 주가도 임종윤 임종훈 사장의 반발로 형제-모녀 간 경영권 분쟁이 본격화되자 큰 폭의 변동성을 보였다. 임종윤 사장이 지난달 중순 X(옛 트위터) 계정에 “한미사이언스와 OCI 발표에 대해 회사 측이나 가족에게 어떠한 형태의 고지나 정보, 자료를 전달받은 적이 없다”고 올리자 직후 한미사이언스의 주가는 큰 폭으로 상승했다.

전문가들은 개인투자자들이 경영권 분쟁에 휩싸인 상장사에 무작정 투자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한 글로벌 사모펀드의 부대표는 “경영권 분쟁이 단기간에 주가를 끌어올릴 만한 재료가 될 수는 있지만 장기적인 기업가치 상승으로 이어진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며 “일반 투자자들이 감내하기 힘들 정도로 변동성이 크고 거래량도 폭증해 웬만해선 건드리지 않는 게 나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강우석 경제부 기자 wskang@donga.com
#경영권#분쟁#소송#유대감 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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