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바꾼다더니 격화소양… 김기현 퇴진이 혁신 출발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27일 00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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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국민 옳다” 강조하고 與 혁신위 띄웠지만
수직적 당정 관계 이미지 김 대표 체제로는
신발 위 발등 긁는 것처럼 쇄신 성과 어려워
용퇴 안하면 인요한 혁신위가 1호 요구 내걸어야

이기홍 대기자
이기홍 대기자
현재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처한 곤경의 원인은 명확하다.

증상이 본격 목격되기 시작한 것은 6·1 지방선거 압승 일주일 뒤인 지난해 6월 둘째주부터였다. 6월 7일 윤 대통령은 출근길 도어스테핑에서 검찰출신 중용에 대한 질문에 “과거에는 민변 출신들이 아주 도배하지 않았느냐”며 발끈했다. 다음 날 정진석 의원(당시 국회부의장)은 느닷없이 이준석 대표를 공격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

중도층과 온건보수의 마음을 떠나게 만든 양대 원인인 △윤 대통령의 오만·불통 이미지와 △여당의 사당화(私黨化)논란 신호탄들이 하루간격으로 발사된 것이다.

윤 대통령 지지율은 직전까지만 해도 상승세로 6월 7~9일 조사 때 53%(한국갤럽)로 고점을 찍었다. 그러나 14~16일 조사에서 49%로 하강세에 들어선 지지율은 “전 정권 장관 중 훌륭한 사람 봤느냐”는 식의 태도가 이어지고, 이준석 축출 과정의 이전투구를 거쳐 경선 룰을 편의대로 바꿔버리고 나경원 안철수를 짓누르는 전무후무한 전당대회 추태를 연출하면서 30%대로 고착됐다.

증상과 원인이 명확하니 처방도 명확하다. 처방은 두 축이다. 하나는 대통령이 리더십 스타일을 경청 공감 소통으로 바꾸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통령과 당 관계의 정상화다.

첫째 처방은 실행에 들어갔다. “국민은 무조건 옳다” “민생 속으로 들어가자”는 대통령의 잇따른 발언 배경을 들어보니 대통령이 민의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진단들이 전해졌다. 두 번째 처방도 혁신위 출범으로 나름 실행 준비에 들어간 듯 보인다.

그런데 국민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필자는 칼럼을 준비하면서 지인들의 의견을 자주 청해 듣는다. 우리 사회 이념 스펙트럼을 극좌1~극우10으로 놓고 펼쳐볼 때 5~8 사이로 분류되는 인사들이다. 최근 며칠간 통화해 보니 놀랍게도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한마디로 격화소양(隔靴搔癢)이라는 것이다. 구두 위로 긁는 시늉만 내는데 어느 국민이 감동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독립을 염원하는 식민 치하 백성들처럼 정권교체를 열망하며 윤 후보에 투표했고 지금도 윤 정부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지적한 핵심은 김기현 체제가 유지되는 한 그걸 누가 진정한 변화 의지로 받아들이겠느냐는 것이다. 김기현이라는 개인에 대한 호감 비호감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김 대표가 즉각 물러나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첫째, 책임을 져야 한다. 대통령중심제에선 모든 게 궁극적으로 대통령 책임이지만 대통령은 수시로 진퇴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내각의 잘못은 총리가, 당의 문제는 대표가 책임져야 한다. 구청장 선거라는 일개 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라는 게 아니라 거기서 재확인된 땅에 떨어진 여당의 위상과 중도층 이반 상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개혁의 장애물이 되어선 안 된다. 대통령 직할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된 김 대표가 있는 한 아무리 혁신위가 개혁안을 내놓아도 당정 관계가 정상화됐다고 여길 국민은 많지 않다. 인요한 혁신위원장 카드는 일단 관심 끄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누가 위원장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에게 얼마만큼의 권한이 위임됐는지를 모두가 알게 공개되어야 그 사람에게 힘이 실린다는 걸 국민도 다 안다.

셋째, 대통령의 운신 폭을 위한 김 대표의 선제적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 윤 대통령으로선 직접 창출한 것이나 다름없는 대표를 내치는 것은 자기부정이 되며, 인간적으로도 강제로 내치기 어려운 처지다.

설령 실제론 당과 대통령실의 관계가 외부에 비쳐지는 것과 다르다 해도 국민의 눈에는 이미 시작부터 그런 이미지가 고착화됐다. 김 대표가 아무리 유능해도 그 태생적 한계를 돌이킬 수 없다.

여권에겐 험난한 길이 예고돼 있다. 세계정세와 국내외 경제상황을 볼 때 내년 총선까지 경제가 좋아질 전망은 거의 없다. 문재인 정권이 남기고 간 오물은 그 누가 와도 치우기 어려운 지경이다.

핵심 지지층은 “이재명 하나 못 잡아넣고 문재인은 손도 못 댄다”고 실망하고, 야당은 구속영장 기각이라는 본질과 무관한 절차적 결정 하나를 등에 업고 활개를 친다. 이재명 대표 측의 노골적인 재판 지연 행각은 어떤 죄든 선거만 이기면 다 뒤엎을 수 있다는, 공화정과 법치주의의 근본조차 무시하는 발상을 보여 준다. 비정상도 보통 비정상이 아닌데도 이를 모두가 당연한 듯 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도치(倒置)의 일상화다.

돌파할 방법은 간단하다. 후보교체론까지 일었던 대선 직전 겨울을 생각하면 된다. 2022년 벽두 윤 후보는 엎드려 절하고 포옹하며 현장으로 갔다. 그때의 초심을 갖고 다시 민생현장으로 가야 한다.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1년 반 동안 자신이 잘했는지 못했는지 귀로 들어야 한다.

윤 대통령의 외교 성과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외교는 어음이고 국내 정치는 현찰이다. 임기 동안 무엇을 우선순위에 둘 것인지를 냉철히 판단해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황소와 싸울 때는 뿔을 잡아 제압하라(take the bull by the horn)’는 말처럼 내정의 난제들을 정면 돌파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김기현 체제 지속에 대한 여당 의원들의 침묵은 공천에 목매 공멸의 길로 갈수도 있는 여당의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배가 침몰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우리끼리 뭉쳐 있으면 그래도 나는 살겠지라는 태도다.

만약 총선에서 패배하면 윤 대통령은 바로 레임덕에 들어간다. 좌파 진영은 총선 승리 시 바로 탄핵운동에 들어가 2027년 대선까지 몰아친다는 전략을 세워 놓고 있다. 윤 정부 5년은 아무 일도 제대로 못해 본 채 진공 기간이 될 수 있다.

김 대표 스스로 용퇴의 결단을 내리는 게 옳지만 더 시간을 질질 끈다면 인요한 혁신위의 첫 번째 혁신 요구안이 김 대표 사퇴가 되어야 마땅하다. 보수 진영 지지자들의 위기감은 깊다. 내년 4월 총선 날 밤에 땅을 치고 후회할 코스로 그대로 갈 것인지의 갈림길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김기현#퇴진#당정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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