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영]“집주인이 대기업 다녀요”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5일 2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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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대출 가능합니다. 임대인 대기업 다녀요.’ 최근 부동산 사이트에 올라온 한 아파트의 매물 설명에는 집주인의 직업 정보가 공개돼 화제가 됐다. 전세사기 때문에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줄 여력이 있는지 따지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엔 집주인의 재직증명서와 국세·지방세 등의 완납 증명서를 요구하는 세입자들도 있다. 집주인을 면접 보고 고르는 셈이다. 전세금 하락분을 돌려주기 힘든 임대인이 차액만큼 세입자에게 월세를 지불하는 이른바 ‘역월세’도 흔해졌다.

▷집주인은 전세금을 내리지 않으면 세입자를 구하기 어렵고, 세입자들은 전세 매물을 골라잡을 수 있는 ‘역전세난’ 속에 나타난 풍경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아파트 전세금은 8.3% 하락했다. 지난달도 매주 1% 안팎으로 가격이 빠졌다. 최근 3개월간 서울 아파트 전세거래 5건 중 1건이 2년 전 계약 때보다 낮은 가격에 이뤄질 정도다. 집값 하락세가 계속되고 있고 올해 상반기에는 신축 아파트 입주도 늘 것으로 보여 당분간 역전세난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불과 2년여 전엔 상황이 정반대였다. 당시 면접관 자리에 앉은 건 집주인이었다. 전세 물건의 씨가 마르고 전세금이 치솟는 ‘전세난’ 때문이었다. 집주인이 세입자의 직업, 재산, 가족관계 등을 따지는 경우도 있어 ‘세입자 고시’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2020년 10월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한 아파트에선 전세 매물을 보려고 10여 명이 아파트 복도에 길게 줄을 선 사진이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계약을 희망하는 ‘예비 세입자’가 많아 제비뽑기로 계약자를 정하는 상황까지 빚어졌다.

▷전세금이 오르면 집주인에게, 내리면 세입자에게 좋지만 전세금의 급등락은 시장 전체엔 부작용을 가져온다. 전세금이 가파르게 오르면 매매가격과의 차이가 줄어들어 집값을 끌어올리는 요인이 된다. 전세사기 일당의 무자본 갭투자가 성행할 환경도 조성된다. 반면 전세금이 급하게 떨어지면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집주인이 늘어나고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에 분쟁도 늘어나게 된다. 임차시장 안정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한국 특유의 주거제도인 전세는 그동안 서민 주거 안정에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 집주인은 전세금을 통해 이자 없이 돈을 빌릴 수 있었고, 세입자에게는 목돈을 모아 내 집 마련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전세 제도가 유지되려면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을 수 있다는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한다. 최근 정부가 무자본 갭투자를 막는 등의 전세사기 대책을 내놨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집주인 동의 없이도 악성 임대인 여부와 체납 세금 유무 등을 확인할 수 있도록 신속한 입법 조치가 필요하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역전세난#집주인#면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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