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키 소설 각색 영화들은 이 고약하고 완고한 원작 팬들을 상대하느라 지쳐 버린 역사다. ‘토니 타키타니’는 하루키 소설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를 살리느라고 정적인 연출로 일관하다가, ‘상실의 시대’는 소설 속 장면을 영상화하는 데 모든 역량을 기울이다가 스토리를 비롯한 나머지 영역에서 힘이 빠진다. 둘 다 동명의 소설 원작을 너무 의식한 탓이다. 이야기를 절정까지 끌고 가지 않고 어느 지점에서 돌연한 이미지 속으로 독자들을 풍덩 빠뜨리는 하루키 소설 속 기교를 보여주려다가, 정작 영화가 이미지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는 인상을 풍기고 만다.
원작에 의지하기보다는 새로운 이미지로 무장하는 영화도 있다. 하루키 초기 단편소설(‘헛간을 태우다’)을 각색한 ‘버닝’이 그렇다. 원작 소설을 상대적으로 덜 의식했다는 점에서는 앞선 작품과 달리 성공했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시각적 이미지가 더 뇌리에 강하게 남는다는 점에서 하루키의 원작과도 돌고 돌아 같은 선상에서 대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의 모호함과 허무를 드러내는 시각적 이미지를 중요시하되, 하루키 소설 속에서 묘사된 바로 그 장면이 아니라 새로운 스타일로 제시하는 영화도 이처럼 가능한 범주 안에 있다.
이 영화는 원작의 설정과 구조와 장면을 거스를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초연하다. 영화만의 차별점이 있다면, 공간에 대해선 각별한 관심을 던진다는 점이다. 특히 영화의 주요 공간 중 하나가 연극 무대라는 점이 중요하다. 소설에선 연극배우라는 주인공의 직업이 제시되지만 연극 무대가 특별히 중요하게 다뤄지진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영화에선 무대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연출에만 관여하던 주인공이 배우로서 무대 공간으로 옮겨가는 장면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장면이 된다.
가후쿠는 아내의 불륜 상대 다카츠키가 해준 말(‘진실로 타인이 보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깊이 똑바로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처럼 무대에 서서 자신의 삶을 스쳐간 일들의 의미를 대면하게 된다. 무대에 선 가후쿠는 영화 속에서 카세트테이프로 녹음된 아내의 목소리와 ‘바냐 아저씨’ 연극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형태로 두 번 반복된 대사(‘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 영화 속 무대 위의 모습은 원작에는 없다.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한 설명(어떤 경우에도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 사고이자 삶의 방식이었다)은 영화에선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과 영화 속 설정은 어느 지점에서 만난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까. 아내의 불륜 상대에게 격정을 터뜨리며 복수를 시도하는 것이 현실적, 그와 만나 술잔을 기울이면서 아내와 나와 상대의 마음을 교차하며 헤아려 보는 장면이 소설적이라면, 무대 위로 내던져진 주인공의 표정을 지켜보는 것이 영화의 방식이라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원작의 모호성을 걷어낸 뒤 확실한 메시지를 세우고, 세계관 속에 인물들을 빠뜨릴 뿐 구체적인 설정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작과는 멀어진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점 때문에 원작에 대한 해석을 풍부하게 한다. 아무리 우리가 과거와 또는 타인과 단절된 듯한 느낌을 받더라도 실은 다른 이들과 같은 무대에 내던져져 있으며, 우리는 이 점을 직시해야만 한다는 것. 그건 하루키의 세계에서 한발 더 나아간 교훈이다. 그리고 그 무대는 언제나 여기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세계’에 있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