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진우]퍼져 가는 인민들의 공포, 김정은의 처방전은 미사일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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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우 정치부 차장
신진우 정치부 차장
2016년 북한 황해도의 한 마을. 깡마른 상관이 목에 힘을 팍 주더니 말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보라.” 더 마른 병사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남조선에서 포를 쏘면 사람도 맞힌다면서요?” 상관이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움직이는 사람까지 쫓아간다.”

40대 탈북민의 경험담이다. 북한 군인들은 이런 얘기를 자주 주고받았단다. 인민들도 삼삼오오 모이면 남조선 군 전력을 밥상머리 얘기로 나눴다고 한다. 그가 어릴 땐 이런 대화가 “남조선 군인 열 명도 문제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경쟁으로 무르익었는데 2010년대 들어 기승전결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남조선 무기에 대한 ‘공포와 과장’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 갔다는 얘기다.

공교롭게도 이런 소문이 번지기 시작한 시기는 김정은 집권 시점과 얼추 맞아떨어진다. 김정은은 이제 막 집권 10년을 찍었고, 남조선에 대한 소문은 이제 당에서 걷어내기 힘들 만큼 스며들었다. 그런 배경을 궁금해했더니 다른 탈북민이 한마디 툭 던졌다. “장마당에 퍼진 남한 드라마에 북한 주민들이 울고 웃은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잖소.”

사실 실상도 소문과 크게 다르진 않다. 미국의 군사력 평가기관인 글로벌파이어파워(GFP)가 2021년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6위, 북한은 28위였다. 국방비만 놓고 보면 한국은 북한보다 13배 이상 많이 썼다. 북한이 전투기 훈련할 기름도 없어 야간 개점휴업인 상황 등을 감안하면 실제 전력 차는 훨씬 더 크다는 게 우리 군 당국의 판단이다. 우리 드라마에서 전투력 ‘만렙’(최고 레벨)으로 표현된 늠름한 북한군 남자 주인공은 현실에선 농번기에 농사하느라 바쁜 ‘투 잡’을 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자화자찬하자는 게 아니다. 북한군이 이렇게 못났으니 마음 놓고 살자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반대로 김정은이 핵·미사일을 절대 놓지 않을 거란 얘기를 하려고 서두를 이렇게 길게 썼다.

김정은이 다시 폭주하고 있다.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쏘며 레드라인을 가볍게 넘었다. 핵실험 임박 징후도 포착됐다. 미사일 도발 배경을 두곤 이런저런 분석이 쏟아진다. 대남(對南)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조 바이든 미 행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등등. 모두 맞지만 절대 간과해선 안 될 팩트가 있다. 김정은의 1호 관심사는 내부 결속이고, 미사일은 가장 효과적인 ‘체제 결속 무기’라는 사실. 인민들도 아는 남북한 재래식 전력 차를 김정은이 모를 리 없다. 결국 남한보다 우월한 ICBM·극초음속미사일·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미사일 세트’는 김정은에게 남은 마지막 카드인 셈이다. ‘수령님’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도구가 미사일이라고 김정은은 보고 있을 터다.

지난달 ICBM 도발 직후 북한 매체는 이례적인 영상을 하나 공개했다. 영상 속 김정은은 반짝이는 가죽점퍼와 선글라스를 뽐내며 미사일 발사장을 활보했다.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상의 편집은 조잡했고 김정은은 우스꽝스러웠다. 인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런 영상까지 만들 만큼 김정은은 절실하다. 그래서 미사일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신진우 정치부 차장 niceshin@donga.com
#북한#김정은#처방전#미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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