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 메우기[동아광장/김금희]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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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소년의 무의미한 ‘구덩이 파기’ 처벌
휴학생 때 매 저녁 욱여넣던 김밥 한줄 떠올라
스스로 좇는 가치 속 노동 의미, 전과 다를 것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삶에 내가 미처 모르는 지겨운 반복과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체감한 건 휴학생이 되어 정기적으로 돈을 벌면서였다. 보습학원 강사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일시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교로 돌아가는 학생이었지만 돈 버는 일이 주가 되자 전혀 다른 현실이 펼쳐졌다. 곤혹스러웠던 것 중 하나는 오후 수업을 하고 본격적인 저녁 수업에 들어가기 앞서 강사들에게 지급됐던 김밥 한 줄이었다. 학원에서는 매일 똑같은 노점에서 똑같은 김밥을 사서 나눠줬다.

물론 식사를 제대로 하기에는 시간이 애매했고 여덟 시나 아홉 시쯤 수업을 끝내는 선생들도 있었으니 그렇게 때우는 편이 우리도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동일한 김밥 한 줄을 욱여넣는 생활이 계속되자 나는 그런 반복과 지겨움을 견뎌내는 일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처음에는 정말 저녁 메뉴에 관한 고민이다가 후에는 삶 자체에 관한 성찰로 커져갔고 그 강도는 점점 세졌다. 매일 저녁 내 앞에 놓여 있는 포일에 싼 김밥은 그때부터 단순한 김밥 한 줄이 아니었다.

미국 작가 루이스 새커의 ‘구덩이’에도 이런 기계적인 패턴의 하루에 놓인 인물이 등장한다. 10대 소년인 스탠리 옐네츠로, 유명 야구 선수의 운동화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텍사스 사막의 초록호수캠프에 입소하게 된다. 청소년교화캠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곳은 청소년들에게 부당 노동을 시키는 수용소였다. 캠프에서 스탠리는 너비와 깊이 1.5m가량의 구덩이를 파라는 지시를 매일 받는다. 무엇을 위해 이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가는 듣지 못한 채 사막의 뜨거운 태양 아래 갈증과 싸워가며 구덩이 수십 개를 파내려간다.

이미 캠프에 들어와 적응한 소년들은 처음에는 첫 번째 구덩이가 제일 힘들다고 스탠리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스탠리가 그 단계를 완수하자 두 번째 구덩이, 그 다음 구덩이로 ‘가장 힘든 단계의 노동’의 문제는 옮겨간다. 첫 단계의 노동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생존의 문제였다면 이후의 노동들은 이런 삶의 기계적인 반복 속에서 자기 생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 하는 정신적 투쟁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덩이’는 청소년 소설로 분류된다. 하지만 어른이 된 누구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실존적 질문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이 담겨 있다. 캠프 생활을 시작한 스탠리가 아이들 사이에 조성된 위계에 적당히 타협하며 적응해 가는 모습은 우리가 이 사회에 곁붙어 살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생존법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오로지 소장이 만든 규칙으로만 운영되는 캠프의 상황은 함께 추구하는 이상적 지향이 없는 조직이란 얼마나 인간 존재를 왜소하고 하찮게 만드는가에 대해 절감하게 한다. 캠프의 교사들은 이런 상황에 대한 자기비판 없이 단순히 아이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역할에 머무르는데 그런 기계적 중립은 결국 악행의 적극적 가담으로 귀결된다.

이렇듯 인간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나쁜 노동, 부당한 강제에 우리의 주인공들은 어떻게 맞서게 될까. 우리가 이미 소설 밖에서 경험한 무력감을 떠올릴 즈음, 이야기는 사막으로의 탈주로 접어든다. 주인공 스탠리와 그의 친구 제로가 캠프의 통제 아래 무가치하게 사느니 차라리 사막이라는 환경적 조건과 싸우는 편을 택한 것이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목마름, 그리고 공포의 방울도마뱀이 있는 사막으로, 하지만 그 모든 공포를 이기고자 할 때 기적처럼 시작되는 삶의 진정한 모험이 있는 공간으로 말이다.

휴학을 했던 그 시절은 내게는 처음으로 멈춰본 순간에 가까웠다. 못하겠다고 감당할 수 없다고 학교에 백기를 들고 빠져나온 시기였다. 그런 시간을 학원 사무실에 앉아 매일 지급되는 김밥 한 줄에 대해 생각했다는 것은 지금 보면 인생의 기억할 만한 ‘사건’이었다. 시선을 달리하면 사실 학교라는 패턴을 나오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시간이기도 했다.

결국 스탠리와 제로는 갖은 고생 끝에 갈증과 배고픔을 스스로 해결하고 밤하늘을 함께 올려다보는 나날을 맞는다. 두 소년이 사막에서 물과 음식을 얻기 위해 한 일은 다름 아닌 또다시 구덩이를 파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탠리는 이전의 어느 순간에도 느껴 보지 못한 행복감으로 마음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거기에는 자기 자신이라는 감각과 근육이 알알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스탠리는 자신을 좋아하고 긍정하는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캠프행을 통해 스탠리가 파내려갔던 건 결국 자기 자신을 ‘메우기’ 위한 희망의 구덩이였던 것이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구덩이#구덩이 파기#구덩이 메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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